왜 우리는 여전히 암기하고, 왜 스승에게 질문하지 못하는가
한 장면을 떠올려 보자. 아마 많은 사람에게 익숙한 장면일 것이다.
새벽 6시, 한국의 어느 고등학교 자습실. 형광등 아래 수십 명의 학생이 책상에 엎드려 있다. 어떤 학생은 영어 단어장을 펼쳐놓고 단어를 가리며 뜻을 중얼거린다. "abridge, 요약하다. abrupt, 갑작스러운. abstain, 삼가다." 다른 학생은 한국사 교과서를 읽으며 밑줄을 긋고 있다. "을사늑약 1905년, 한일병합 1910년, 3·1 운동 1919년." 또 다른 학생은 수학 공식을 노트에 반복해서 적고 있다. 모든 학생이 하고 있는 것은 본질적으로 같은 행위다. 텍스트를 읽고, 그 내용을 머릿속에 새기고, 시험에서 그것을 정확하게 재현하는 훈련.
이 장면에서 2,500년 전 공자의 제자들이 논어를 암송하던 모습을, 1,000년 전 과거 시험장에서 사서의 구절을 인용하며 답안을 쓰던 유생의 모습을, 500년 전 조선의 서당에서 천자문을 소리 내어 읽던 아이의 모습을 겹쳐 보는 것은 과장일까. 아닐 것이다. 텍스트를 암기하고, 정해진 해석을 익히고, 그것을 시험에서 재현하는 구조는 수천 년에 걸쳐 형성된 동아시아 교육의 가장 깊은 층위다. 우리는 그것이 너무 익숙해서, 그것이 하나의 '전통'이라는 사실조차 잊고 있다.
암기는 왜 이토록 강력한 전통이 되었을까.
그 뿌리는 과거제도에 있다. 수(隋)나라에서 시작되어 청(淸)나라까지 1,300년간 이어진 과거제도는 동아시아 문명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시스템 중 하나였다. 과거 시험의 핵심은 경전 해석이었다. 시험관이 사서오경의 구절을 제시하면, 응시자는 그 구절의 의미를 해석하고, 주희의 주석에 근거하여 논증하는 글을 써야 했다. 이 시험을 통과하려면 두 가지가 필수적이었다. 첫째, 경전의 원문을 정확하게 암기해야 했다. 둘째, 주희가 부여한 해석을 정확하게 재현해야 했다.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시험에서 요구된 것이 '자기만의 해석'이 아니라 '올바른 해석의 재현'이었다는 점이다. "주자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에 이 구절은 이렇게 해석해야 한다." 이것이 좋은 답안의 형식이었다. 독창적인 해석은 위험했다. 주희의 체계에서 벗어난 답안은 감점 사유가 되거나, 아예 낙방의 원인이 되었다. 시험이 암기와 재현을 요구했으므로, 교육도 자연스럽게 암기와 재현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서당에서, 향교에서, 성균관에서, 학생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텍스트를 소리 내어 읽고, 반복하여 외우는 것이었다.
이 구조를 한번 오늘날과 겹쳐 보자. 수능이라는 시험이 있다. 국어 영역에서 학생은 지문을 읽고, '출제자가 의도한' 해석에 따라 답을 골라야 한다. 영어 영역에서 학생은 단어를 암기하고, 문법 규칙을 외워야 한다. 한국사에서 학생은 연도와 사건을 외워야 한다. 시험이 요구하는 것이 '자기만의 질문'이 아니라 '정해진 답의 재현'이라는 점에서, 수능의 구조는 과거제도의 구조와 놀랍도록 닮아 있다. 물론 내용은 전혀 다르다. 사서오경 대신 EBS 교재가, 주희의 주석 대신 출제 매뉴얼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암기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의사가 약물의 용량을 모르면 환자가 위험하고, 엔지니어가 공식을 틀리면 건물이 무너진다.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에서 반복과 기억은 필수적이다. 문제는 암기가 교육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었을 때 발생한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가?"라는 질문은 "이 원리를 외워라"로 대체되고,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이 해석을 암기해라"로 대체된다. 질문이 사라지고, 답만 남는다. 2장에서 추적해 온 바로 그 과정이 여기서 완성된다.
암기와 함께, 동아시아 교육이 남긴 또 하나의 강력한 유산은 '텍스트를 읽는 법'이다.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독서(讀書)는 단순한 정보 수집이 아니었다. 그것은 수양이었다. 퇴계 이황은 독서의 자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옷매무새를 바로 하고, 자세를 정돈하고, 마음을 가라앉힌 후에 책을 펼쳐야 한다. 한 글자 한 글자를 꼼꼼하게 읽되,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 읽다가 의문이 생기면 그 자리에서 멈추어 깊이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거경(居敬), 즉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텍스트를 대하는 태도였다.
이 태도에는 아름다운 면이 있었다. 텍스트를 대충 훑는 것이 아니라 한 문장 한 문장에 온 마음을 기울이는 것. 읽는 행위 자체가 인격을 형성한다는 믿음. 오늘날 속독과 다독이 미덕이 된 시대에, 이런 느린 독서의 전통은 오히려 귀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전통에는 그림자가 있었다. '무엇을 읽을 것인가'가 이미 정해져 있었다는 것이다. 읽어야 할 텍스트는 사서오경이었다. 읽는 순서도 정해져 있었다. 주희는 『대학』을 먼저 읽고, 다음에 『논어』와 『맹자』를 읽고, 마지막에 『중용』을 읽으라고 했다. 해석의 방향도 정해져 있었다. 주희의 주석을 따라야 했다. "왜 이 텍스트를 읽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거의 제기되지 않았다. 경전은 읽어야 하는 것이었고, 문제는 오직 "어떻게 읽을 것인가"뿐이었다.
이 구조를 오늘날의 교실로 가져와 보자. "교과서"라는 단어를 떠올려 보라. 교과서에는 정답이 담겨 있다. 학생은 교과서를 읽고, 그 내용을 이해하고, 시험에서 재현한다. "교과서에 없는 내용은 시험에 나오지 않는다." "교과서를 벗어나지 마라." 이 말들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다. 교과서가 경전의 자리를 물려받은 것이다. 물론 교과서는 필요하다. 체계적인 지식을 전달하는 효율적인 도구다. 하지만 교과서가 '정답의 원천'이 되는 순간, 교과서 밖의 질문은 불필요한 것이 되고, 학생의 독자적인 사유는 시험과 무관한 사치가 된다. 조선의 유생이 사서오경 밖의 세계를 묻지 못했던 것처럼, 오늘날의 학생도 교과서 밖의 세계를 묻기 어렵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위에, 가장 보이지 않으면서도 가장 강력한 유산이 있다. 스승에 대한 태도다.
다시 한 장면을 상상해 보자. 한국의 어느 대학 강의실이다. 교수가 한 시간 동안 강의를 한다. 강의가 끝난다. 교수가 묻는다. "질문 있습니까?" 침묵이 흐른다. 5초, 10초. 아무도 손을 들지 않는다. 교수가 다시 묻는다. "정말 질문 없어요?" 약간의 웃음이 번지지만, 여전히 아무도 손을 들지 않는다. "그럼 오늘 수업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학생들이 가방을 챙기며 일어난다.
이 침묵은 무엇인가. 학생들이 정말 아무 궁금한 것이 없어서일까? 아닐 것이다. 어떤 학생은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지만, 질문하면 "그것도 모르냐"는 시선을 받을까 두려워한다. 어떤 학생은 교수의 설명에 동의하지 않지만, "선생님, 그건 좀 다르지 않나요?"라고 말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어떤 학생은 질문이 떠올랐지만, 수업 흐름을 끊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한다.
이 태도의 뿌리는 깊다. 공자는 "스승의 도를 존경하라"고 말했다. 이 말 자체는 합리적이다. 배우려면 존경이 필요하다. 하지만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존경은 조금씩 복종으로 변질되었다. 스승의 말은 의심할 수 없는 것이 되었고, 스승의 해석이 곧 정답이 되었으며, 스승을 반박하는 것은 불경한 일이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논어 자체가 이 전통을 뒷받침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논어에는 제자가 공자에게 반문하는 장면, 의아해하는 장면, 심지어 불만을 표현하는 장면도 나온다. 자로는 공자에게 대놓고 불만을 말했고, 재여는 공자의 가르침에 반기를 들어 공자로부터 "썩은 나무는 조각할 수 없다(朽木不可雕也)"라는 혹독한 말을 들었다. 공자는 반박을 금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분발하지 않으면 열어주지 않고(不憤不啓), 답답해하지 않으면 이끌어주지 않는다(不悱不發)"고 했다. 학생이 스스로 고민하고, 스스로 답답해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비로소 가르치는 것. 이것은 소크라테스의 산파술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하지만 주희 이후, 경전이 절대적 권위를 갖게 되면서 경전을 해석하는 스승도 그 권위를 나누어 가졌다. 경전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불경이라면, 경전을 가르치는 스승에게 의문을 제기하는 것도 불경이다. 이 논리가 수백 년 동안 작동하면서, 교실은 질문이 살아 숨쉬는 공간이 아니라 지식이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공간이 되었다.
이쯤에서 한 가지 비교를 해보자. 서구의 교실은 정말 다른가?
솔직히 말해야 한다. 서구에도 권위적 교육의 역사는 길다. 중세 유럽의 교육은 성경의 권위 아래 있었고, 교회가 허용하지 않는 질문은 이단으로 처벌받았다.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주장했다가 종교재판에 회부된 것은 17세기의 일이다. 서구가 '비판적 사고'를 교육의 핵심 가치로 내세우기 시작한 것은 계몽주의 이후, 그러니까 겨우 200~300년의 역사에 불과하다.
하지만 차이도 분명히 있다.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선언했다. 스승이 정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중세 대학의 디스푸타티오에서 학생은 교수의 명제에 공식적으로 반박해야 했다. 반박하는 것이 훈련의 일부였고, 반박 능력이 곧 학문적 역량이었다. 근대 이후 서구 대학의 세미나에서 교수가 "여러분은 동의합니까?"라고 묻는 것은, 아테네의 아고라에서 소크라테스가 "당신은 정말 그렇게 생각하오?"라고 묻던 것의 제도화된 후손이다.
동아시아에서 이에 해당하는 제도적 전통은 상대적으로 약했다. 공자 자신은 대화와 반문을 허용했지만, 그 정신이 교육 제도로 정착되지 못했다. 과거제도가 만든 시스템은 질문이 아니라 재현을 보상했고, 성리학이 만든 체계는 의심이 아니라 확신을 요구했다. 그 결과, '스승 앞에서 침묵하는 것이 예의'라는 감각이 수백 년에 걸쳐 체화되었다.
여기서 불편하지만 중요한 질문을 하나 던져야 한다.
우리는 이 유산을 어떻게 할 것인가?
쉬운 답은 이렇다. "서구식 토론 교육을 도입하자. 질문을 장려하자. 비판적 사고를 가르치자." 한국 교육 개혁의 방향은 지난 수십 년간 거의 항상 이 방향이었다. 토론 수업, 발표 수업, 프로젝트 기반 학습, 자기주도적 학습. 이 모든 것이 시도되었다. 하지만 솔직히 물어보자. 얼마나 바뀌었는가?
교실의 물리적 배치가 바뀌고, 교육과정 문서에 '비판적 사고'라는 단어가 추가되어도, 수천 년에 걸쳐 형성된 감각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선생님이 말씀하시면 일단 들어야 한다"는 감각. "질문은 모르는 사람이 하는 것이다"라는 수치심. "남들 앞에서 틀리면 안 된다"는 두려움. 이것은 교육 정책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문화의 가장 깊은 층위에 새겨진 습관이다.
그렇다고 이 유산이 전적으로 부정적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텍스트를 꼼꼼하게 읽는 능력, 체계적으로 지식을 정리하는 능력, 스승과 선배를 존중하는 문화, 교육에 대한 깊은 열의. 이것들은 동아시아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교육 수준을 달성하는 데 기여한 힘이기도 하다. 한국의 학생들이 PISA 등 국제 학력 평가에서 상위권을 차지하는 것은 이 전통의 힘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문제는 암기와 해석 '자체'가 아니라, 암기와 해석 '만'이 교육의 전부가 되어버린 구조다. 경전을 읽되 질문도 할 수 있었다면, 스승을 존경하되 반박도 허용되었다면, 시험에서 재현 능력을 측정하되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능력도 평가했다면. 공자가 원래 그랬던 것처럼. 안연에게는 이렇게 답하고, 중공에게는 저렇게 답하며, "나도 모른다"고 말할 수 있었던 그 스승의 태도가 제도 안에 살아 있었다면.
2장 전체를 돌아보자.
춘추전국시대, 동아시아에는 질문이 넘쳤다. 공자, 맹자, 장자, 묵자, 한비자. 누구도 확정적인 정답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그것이 오히려 사유의 깊이를 만들었다. "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매번 다르게 대답하던 공자는, 소크라테스가 "정의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물었던 것과 같은 정신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한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다양했던 사상은 유교 하나로 좁혀졌다. 오경이 정전이 되었고, 태학이 세워졌으며, 질문하는 학자들은 경전을 해석하는 관료로 변모했다. 주희가 성리학을 완성하면서 이 과정은 극에 달했다. 모든 질문에 답이 있는 체계가 만들어졌고, 과거제도와 결합하면서 그 체계는 수백 년간 동아시아 전역을 지배했다. 공자의 질문은 주희의 답이 되었고, 주희의 답은 시험 문제가 되었다.
그 유산이 오늘 아침, 새벽 자습실에서 단어를 중얼거리는 학생의 입술 위에, 교수의 질문에 침묵하는 강의실의 공기 속에, "교과서에 없는 건 안 나온다"는 말 속에 여전히 살아 있다.
이제 시선을 다시 서쪽으로 돌리자.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 이후, 지중해 세계에서도 질문의 운명은 순탄하지 않았다. 로마라는 거대한 제국이 등장한다. 이 제국은 아테네와 달리, 처음부터 질문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왜?"가 아니라 "어떻게?"를, 철학이 아니라 도로와 수도관과 법률을 원했던 문명. 그곳에서 교육은 어떤 모습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