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로마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없는가
질문이 필요 없었던 제국
기원전 146년, 로마 장군 루키우스 뭄미우스가 코린토스를 함락시켰다.
그리스의 가장 부유한 도시 중 하나였던 코린토스는 불에 탔다. 남자들은 살해되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팔렸다. 뭄미우스의 병사들은 그리스의 걸작 조각상과 그림을 전리품으로 짊어졌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뭄미우스는 병사들에게 이렇게 경고했다. "운반 중에 파손되면 똑같은 것을 새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는 그 예술품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이해한 것은 예술품의 '가격'이었지, 그것을 탄생시킨 문화의 의미가 아니었다.
이 장면은 로마와 그리스의 관계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로마는 그리스를 정복했다. 그리고 그리스의 것들을 가져왔다. 조각상, 그림, 건축 양식, 문학, 언어, 철학. 로마의 상류층 자제는 그리스어를 배웠고, 그리스 가정교사를 두었으며, 아테네로 유학을 갔다.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는 이렇게 썼다. "정복된 그리스가 야만적인 승리자를 정복했다(Graecia capta ferum victorem cepit)." 군사적으로는 로마가 이겼지만, 문화적으로는 그리스가 이겼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유명한 구절에는 정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로마는 그리스 문화의 '전부'를 가져온 것이 아니었다. 로마가 가져온 것은 조각상과 시와 수사학이었다. 로마가 가져오지 않은 것―혹은 가져왔지만 심장까지는 이식하지 못한 것―은 질문하는 정신이었다.
로마에는 플라톤이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없었다. 에우클레이데스가 없었다. 아르키메데스가 없었다(아르키메데스는 시칠리아의 그리스 식민도시 시라쿠사 사람이었고, 그를 죽인 것이 로마 병사였다는 사실은 상징적이다). 로마는 역사상 가장 크고, 가장 오래 지속되고, 가장 효율적인 제국 중 하나를 건설했다. 하지만 그 거대한 제국의 500년 역사에서, 원래적 의미의 철학자―세계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정의란 무엇인지,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를 처음부터 묻고 체계적으로 탐구한 사람―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왜일까. 로마인이 그리스인보다 덜 똑똑해서? 아니다. 답은 더 흥미롭다. 로마는 질문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아테네와 로마가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사회였음을 먼저 파악해야 한다.
아테네의 아고라를 떠올려 보자. 1-1장에서 그렸던 그 장면. 수백 명의 시민이 광장에 모여 소리치고, 토론하고, 설득하려 애쓰는 곳. 거기서 중요한 것은 '더 좋은 논증'이었다. 왜 이 법이 옳은가? 왜 저 정책이 잘못되었는가? 시민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민주주의에서, 말과 논리는 생존의 도구였다. 그리고 더 좋은 논증을 찾으려면, 더 깊이 질문해야 했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철학적 유희가 아니었다. 법정에서, 민회에서, 매일 내려야 하는 결정의 근거를 찾는 실천적 작업이었다.
이제 로마의 포럼(Forum)을 그려보자. 포럼도 광장이었다. 거기서도 사람들이 모여 연설을 들었다. 하지만 분위기가 달랐다. 아테네의 아고라에서는 '누구나' 발언할 수 있었고, 청중은 논증의 질로 승부를 판단했다. 로마의 포럼에서는 원로원 의원이나 집정관, 즉 이미 권위가 인정된 사람들이 연설했다. 청중은 논증의 질보다는 연설자의 지위와 웅변의 기술에 반응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옳은가'보다 '누가 더 설득력 있게 말하는가'였다.
이 차이는 사소해 보이지만 결정적이다. 아테네에서는 질문이 답보다 먼저 왔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먼저 묻고, 그 답을 찾아 나갔다. 로마에서는 답이 질문보다 먼저 왔다. 제국을 유지해야 한다. 법을 집행해야 한다. 속주를 다스려야 한다. 이것은 이미 정해진 목표였다. 남은 것은 "어떻게"뿐이었다.
"왜"와 "어떻게"의 차이. 이것이 그리스와 로마를 가르는 핵심이었다.
그리스인은 물었다. "왜 물체는 떨어지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물체는 자연의 장소를 향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이 답은 틀렸다. 하지만 질문은 옳았다. 이 질문이 2,000년 뒤 뉴턴의 만유인력으로 이어졌다.
로마인은 물었다. "어떻게 하면 물을 50킬로미터 떨어진 도시까지 운반할 수 있는가?" 그리고 수도교(aqueduct)를 지었다. 이 기술은 경이로웠다. 퐁뒤가르(Pont du Gard)는 2,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서 있다. 하지만 로마의 엔지니어는 "왜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가"를 묻지 않았다. 물이 흐른다는 사실을 이용했을 뿐이다. 작동하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로마가 질문 대신 집중한 것은 세 가지였다. 법률, 행정, 공학. 이 세 가지가 제국을 떠받치는 기둥이었고, 로마 교육의 궁극적 목적도 이 기둥을 세울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먼저 법률. 로마가 인류에게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은 콜로세움도, 도로도 아니다. 법이다.
기원전 450년경 제정된 십이표법(Twelve Tables)에서 시작하여,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로마법대전(Corpus Juris Civilis)』에 이르기까지, 로마는 약 1,000년에 걸쳐 법률 체계를 발전시켰다. 이 과정은 놀랍도록 실용적이었다. 그리스인이라면 "정의란 무엇인가"를 먼저 물었을 것이다. 플라톤은 『국가』 전체를 이 질문에 바쳤다. 하지만 로마의 법률가는 그런 식으로 시작하지 않았다. 분쟁이 발생했다. 판결이 내려졌다. 비슷한 분쟁이 또 발생했다. 이전 판결을 참고했다. 판례가 축적되었다. 축적된 판례에서 원칙이 도출되었다. 원칙이 성문화되었다.
이것은 귀납적 과정이었다. 추상적 원리에서 구체적 규칙을 연역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 사건에서 추상적 원리를 귀납해낸 것이다. "소유권이란 무엇인가"를 철학적으로 정의한 뒤에 재산법을 만든 것이 아니라, 수천 건의 재산 분쟁을 처리하면서 소유권의 개념이 정교해진 것이다. 이 방식은 철학적으로는 보잘것없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실용적으로는 압도적이었다. 오늘날 유럽 대부분의 법체계(대륙법계)가 로마법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다음으로 행정. 로마 제국은 최전성기에 지중해 전역, 브리타니아에서 메소포타미아까지, 약 500만 평방킬로미터를 다스렸다. 이 광대한 영토를 관리하기 위해 로마는 정교한 관료 체계를 만들었다. 속주(provincia)마다 총독이 파견되었고, 총독 아래 관리들이 세금을 걷고, 인구를 조사하고, 병력을 모집하고, 재판을 집행했다. 보고 체계가 정연했고, 위계가 명확했다. 로마의 관료는 질문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중앙의 지침을 지방에서 집행하는 사람이었다. "왜 이 세금을 걷어야 하는가"를 묻는 것은 그의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효율적으로 걷을 것인가"가 그의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공학. 여기서 로마의 실용적 천재성이 가장 눈부시게 드러난다.
도로. 로마는 제국 전역에 10만 킬로미터가 넘는 도로를 건설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이 도로는 단순한 흙길이 아니었다. 자갈과 모르타르를 층층이 쌓고, 표면을 평탄하게 다듬었으며, 배수를 위해 중앙을 약간 높게 만들었다. 일부 도로는 2,0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쓸 수 있다. 수도교. 로마 시내에만 11개의 수도교가 물을 공급했다. 하루에 약 100만 세제곱미터의 물이 도시로 흘러들었다. 퐁뒤가르, 세고비아의 수도교 같은 구조물은 오늘날 봐도 경탄을 자아낸다. 콘크리트. 로마인은 오푸스 카이멘티키움(opus caementicium)이라 불리는 일종의 콘크리트를 발명했다. 판테온의 거대한 돔은 이 콘크리트로 지어졌으며,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세계 최대의 비보강 콘크리트 돔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로마의 엔지니어는 "왜 아치가 무게를 지탱하는가"를 수학적으로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이 비율로, 이 재료로, 이 두께로 지으면 무너지지 않는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왜"는 필요 없었다. "작동하느냐"가 유일한 기준이었다.
이런 사회에서 교육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로마의 소년이 교육받는 과정을 따라가 보자. 상류층 가정의 아이라고 하자. 일곱 살이 되면 루두스(ludus)라 불리는 초등 학교에 간다. 리테라토르(litterator)라는 교사에게 읽기, 쓰기, 셈하기를 배운다.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함께 배운다. 이 단계에서 교육의 목표는 단순하다. 기본적인 문해력.
열두 살쯤 되면 그라마티쿠스(grammaticus)에게 넘어간다. 여기서 문법과 문학을 배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를 읽는다. 텍스트를 정확하게 읽고, 문법적으로 분석하고, 수사적 기법을 파악하는 훈련이다.
그리고 열다섯 살 전후에 최종 단계에 들어간다. 레토르(rhetor), 수사학 교사에게 배우는 것이다. 이것이 로마 교육의 정점이었다. 수사학. 말하는 기술. 설득하는 기술. 로마 사회에서 성공하려면―법정에서 변론하고, 원로원에서 연설하고, 군대 앞에서 장병들을 고무하려면―웅변 능력이 필수적이었다. 학생들은 가상의 법정 사건을 놓고 연습했다. 찬성 측과 반대 측을 번갈아 맡아 논증을 구성하고, 감정에 호소하고, 청중을 사로잡는 기법을 연마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을 짚어야 한다. 수사학은 '무엇이 옳은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를 묻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 차이를 날카롭게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소피스트들―돈을 받고 수사학을 가르치는 사람들―을 비판했다. "그들은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설득하는 기술을 가르친다."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진리 없는 설득은 위험했다. 하지만 로마는 정확히 그 '진리 없는 설득'의 기술을 교육의 중심에 놓았다.
그렇다면 철학은? 철학은 있었다. 하지만 교육과정의 핵심이 아니라 교양의 장식이었다. 부유한 로마 가문의 자제들은 아테네에 유학을 가서 철학을 배우기도 했다. 키케로가 그랬고, 아우구스투스의 조카 마르켈루스가 그랬다. 하지만 그것은 오늘날 상류층 자제가 파리에 가서 미술사를 배우는 것과 비슷한 성격이었다. 삶의 핵심이 아니라, 삶을 장식하는 것. 교양 있는 로마인이 저녁 식사 자리에서 에피쿠로스의 쾌락론이나 스토아의 부동심에 대해 대화할 수 있으면 좋았다. 하지만 아침이 되면 법정에 가야 했고, 원로원에 출석해야 했으며, 속주의 행정을 감독해야 했다. 철학은 저녁의 대화였지, 아침의 일이 아니었다.
이쯤에서 아테네와 로마의 교육을 나란히 놓아보자.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는 광장에서 아무나 붙잡고 "정의란 무엇인가"를 물었다. 돈을 받지 않았다. 직업도 없었다. 질문하는 것 자체가 그의 삶이었다. 플라톤은 아카데미를 세우고 40년간 가르쳤다. 가르친 것은 수사학이 아니라 변증법―대화를 통해 진리에 다가가는 방법―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리케이온에서 논리학, 형이상학, 윤리학, 정치학, 생물학, 물리학을 가르쳤다. "왜"를 묻는 것이 학문의 전부였다.
로마에서 교육의 목표는 달랐다. '비르 보누스 디켄디 페리투스(vir bonus dicendi peritus)'―"말 잘하는 선한 사람"을 기르는 것. 퀸틸리아누스(35~100년경)가 『웅변술 교육(Institutio Oratoria)』에서 제시한 이 이상은, 로마 교육의 핵심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 선하고, 말을 잘하는 사람. 여기에 '질문하는 사람'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도덕적 품성과 수사적 능력. 이 두 가지가 로마가 교육에서 추구한 전부였다.
이것은 한나라가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삼고, 태학에서 경전 해석을 가르친 것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지구의 양쪽 끝에서, 거의 같은 시기에, 거대한 통일 제국이 교육의 목적을 '질문'에서 '기술'로 전환시킨 것이다. 아테네에서 열려 있던 질문이 로마에서 닫혔고, 춘추전국시대에 열려 있던 질문이 한나라에서 닫혔다. 통일 제국은 질문의 다양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나의 체제를 유지하는 기술이 필요할 뿐이다.
하지만 공정하게 말해야 한다. 로마의 실용주의를 너무 폄하하는 것도 편향이다.
로마법은 '정의란 무엇인가'를 철학적으로 정의하지 않았지만, 수천 건의 구체적 분쟁을 해결하면서 실질적인 정의를 구현했다. "각자에게 그의 몫을 돌려주는 것이 정의다(suum cuique tribuere)"라는 로마법의 원칙은, 플라톤의 정의론만큼이나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로마의 도로와 수도교는 수백만 명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했다. 그리스의 철학이 소수의 지식인 사이에서 나눠진 대화였다면, 로마의 기술은 제국 전체의 삶을 바꾼 현실이었다.
그리고 "왜"를 묻지 않았다는 것이 반드시 열등함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기업들 중 상당수는 "왜"보다 "어떻게"에 집중한다. 기초 과학보다 응용 기술에 투자하는 사회가 단기적으로는 더 큰 부를 창출하기도 한다. 로마가 보여준 것은 "왜"를 묻지 않고도 문명을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로마가 보여준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왜"를 묻지 않는 문명은 결국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새로운 질문이 없으면, 기존의 답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을 때 대안이 없다. 로마는 도로를 놓았지만, 도로의 원리를 수학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더 나은 도로를 설계하는 과학적 방법론이 발전하지 못했다. 로마는 콘크리트를 발명했지만, 왜 그 혼합물이 단단해지는지를 화학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콘크리트 기술은 로마와 함께 사라졌고, 중세 유럽은 그것을 재발견하는 데 수백 년이 걸렸다.
"어떻게"는 당장의 문제를 해결한다. "왜"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문제에 대비하게 한다. 로마는 전자에 탁월했고, 후자에 무관심했다. 그 결과는 수백 년 뒤에 나타나게 된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제국에서, 질문하는 사람은 정말 아무도 없었을까?
아니다. 소수였지만, 있었다. 로마에도 그리스의 질문 정신을 이어받으려 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이 키케로다. 정치가이면서 철학자, 웅변가이면서 질문자. 로마라는 실용의 바다에서 그리스의 질문을 지키려 한, 어쩌면 로마에서 마지막으로 진지하게 질문한 사람. 그의 이야기를 다음에 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