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서 마지막 질문
질문은 교양이었지, 생존 조건은 아니었다
기원전 43년 12월 7일, 예순세 살의 노인이 가마에 실려 바닷가를 향해 도망치고 있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로마 최고의 웅변가, 전직 집정관, 수십 권의 철학서와 수백 편의 연설문을 남긴 사람. 하지만 지금 그는 사냥감이었다. 안토니우스가 작성한 살생부(proscriptio)에 그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 키케로가 원로원에서 안토니우스를 맹렬히 비난하는 연설―'필리피카이(Philippicae)'―을 열네 차례나 했기 때문이었다.
추격자들이 따라잡았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키케로는 가마의 커튼을 젖히고 목을 내밀며 말했다. "병사여, 여기 있다. 자네가 할 일을 하라." 병사가 칼을 휘둘렀다. 키케로의 머리와 오른손이 잘렸다. 안토니우스의 아내 풀비아는 그 머리를 가져오게 해서, 키케로의 혀를 머리핀으로 찔렀다고 한다. 로마를 가장 뛰어나게 말한 혀를.
키케로의 머리와 손은 로마 포럼의 연단―로스트라(Rostra)―위에 전시되었다. 키케로가 수십 년간 연설했던 바로 그 연단 위에. 이것은 단순한 정치적 보복이 아니었다. 상징이었다. 로마에서 질문하는 목소리가 물리적으로 절단되었다.
키케로(기원전 106~43년)는 로마 역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그는 로마인이면서 그리스적이었다. 실용의 도시에서 질문의 정신을 지키려 한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그는 보통의 로마 엘리트와 달랐다. 물론 그도 수사학을 배웠고, 법정에서 변론했으며, 정치적 야심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스물일곱 살에 아테네와 로도스로 유학을 떠났다. 아테네에서는 아카데미 학파의 필론에게 철학을 배웠고, 로도스에서는 스토아 학파의 포시도니오스에게 배웠다. 그리스의 세 학파―아카데미(플라톤), 스토아, 에피쿠로스―를 두루 접하고 돌아왔다.
로마로 돌아온 뒤 키케로는 정치인으로서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기원전 63년에는 집정관에 올랐고, 카틸리나 반란을 진압하여 "조국의 아버지(pater patriae)"라는 칭호를 받았다. 하지만 그의 삶의 후반부는 패배의 연속이었다. 카이사르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공화정이 무너졌다. 키케로가 평생 수호하려 한 것―원로원 중심의 공화정, 시민들의 토론을 통한 통치―이 사라지고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키케로가 가장 많은 철학서를 쓴 것은 정치에서 밀려난 시기였다. 기원전 46~44년, 정치적으로 소외된 2년 사이에 그는 놀라운 속도로 철학 저작을 쏟아냈다. 『의무에 대하여(De Officiis)』, 『신들의 본성에 대하여(De Natura Deorum)』, 『선과 악의 궁극에 대하여(De Finibus)』, 『투스쿨룸 담론(Tusculanae Disputationes)』. 정치의 무대에서 쫓겨난 웅변가가, 비로소 진지하게 질문을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키케로 개인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로마에서 철학의 위치를 보여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로마에서 철학은 정치가 허용하는 틈새에서만 존재했다. 정치가 잘될 때는 법정과 원로원이 삶의 전부였고, 정치에서 밀려났을 때 비로소 "정의란 무엇인가",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같은 질문이 비집고 들어왔다. 아테네에서 철학이 삶의 중심이었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소크라테스는 정치에서 물러나서 철학을 한 것이 아니라, 철학이 그의 유일한 삶이었다. 키케로에게 철학은 언제나 '두 번째' 삶이었다.
키케로의 철학은 독창적이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인정했다. "나는 그리스인들의 생각을 라틴어로 옮기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 '옮기는' 작업이 가져온 결과는 결코 사소하지 않았다.
키케로가 한 것은 번역 이상이었다. 그리스 철학의 핵심 개념들에 라틴어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리스어 'moral philosophia'는 라틴어 'philosophia moralis'가 되었고, 'qualitas(성질)', 'quantitas(양)', 'essentia(본질)', 'humanitas(인간성)' 같은 단어가 키케로에 의해 만들어졌거나 철학적 의미를 부여받았다. 이 라틴어 용어들은 이후 서양 철학의 기본 어휘가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영어로 'quality', 'quantity', 'essence', 'humanity'라고 말할 때, 우리는 키케로가 만든 단어의 후손을 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키케로가 그리스 철학을 로마에 옮기면서, 변형이 일어났다. 가장 중요한 변형은 철학의 목적이 바뀐 것이다.
아테네에서 철학의 목적은 진리의 탐구였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묻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다. 답을 찾지 못하더라도, 질문하는 과정에서 영혼이 성장한다고 소크라테스는 믿었다.
키케로에게 철학의 목적은 달랐다. 그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실용적 지침이었다. 『의무에 대하여』에서 키케로가 다루는 것은 추상적 도덕 원리가 아니라, 로마 시민이 구체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이다. 약속을 지켜야 하는가? 항상 그렇다, 단 적에게 한 약속은 예외다. 개인의 이익과 공공의 이익이 충돌하면? 공공의 이익이 우선한다. 이것은 철학이라기보다 '교양 있는 로마 시민의 행동 지침'에 가까웠다.
이 변형은 우연이 아니었다. 로마라는 사회가 철학에 요구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진리의 탐구가 아니라, 실용적 지혜. "세계의 근본 원리는 무엇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훌륭한 시민이 될 수 있는가." 철학이 로마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로마의 언어로 말해야 했다. 그 언어는 실용이었다.
키케로의 뒤를 이어, 로마에서 가장 오랫동안 영향력을 유지한 철학은 스토아 학파였다.
스토아 학파는 원래 그리스에서 태어났다. 기원전 3세기, 키프로스 출신의 제논이 아테네의 스토아 포이킬레(채색 회랑)에서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시작이었다. 그리스 스토아의 핵심 사상은 두 가지였다. 첫째, 자연과 일치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주에는 로고스(이성, 질서)가 관통하고 있으며, 인간도 그 로고스의 일부다. 둘째, 모든 인간은 이성을 가진 존재로서 평등하다. 그리스인이든 야만인이든, 자유인이든 노예든. 이것이 코스모폴리테스(세계 시민주의)였다.
로마에 건너오면서, 이 사상은 결정적으로 변형되었다.
세네카(기원전 4~기원후 65년)를 보자. 그는 네로 황제의 스승이자 고문이었다. 로마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하나이기도 했다. 세네카의 철학은 "어떻게 평정심을 유지할 것인가"에 집중되어 있었다. 분노를 다스리는 법, 슬픔을 견디는 법,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법. 이것은 깊이 있는 통찰이었지만, 그리스 스토아의 급진적 세계 시민주의와는 거리가 있었다. 세네카는 노예제가 부당하다고 암시하면서도, 자신의 노예를 해방시키지는 않았다. 물질적 욕망을 경계하면서도, 거대한 부를 누렸다. 이 모순을 비판하는 것은 쉽지만, 이 모순이야말로 로마에서 철학이 처한 위치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철학은 삶을 바꾸는 힘이 아니라, 삶을 견디게 해주는 위안이었다.
에픽테토스(50~135년경)는 다른 궤적을 보여준다. 그는 노예 출신이었다. 주인에게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학대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해방된 뒤 스토아 철학을 가르쳤다. 그의 가르침은 단순하고 강력했다.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과 달려 있지 않은 것을 구별하라." 건강, 재산, 명예, 타인의 행동. 이것들은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다.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은 오직 우리 자신의 판단과 태도뿐이다. 에픽테토스에게 이것은 철학적 명제가 아니라 체험이었다. 노예로서 자유를 빼앗긴 사람이, 그래도 빼앗기지 않는 것―자신의 내면―을 발견한 것이니까.
그리고 가장 독특한 인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21~180년). 로마 황제이면서 철학자. 그의 『명상록(Meditationes)』은 황제의 일기장이었다. 군 사령관으로서 변경에서 전쟁을 치르면서, 밤에 텐트 안에서 자기 자신에게 쓴 글. "새벽에 일어나기 싫을 때, 이렇게 생각하라. 나는 인간으로서의 일을 하기 위해 일어나는 것이다." "곧 너는 모든 것을 잊을 것이고, 곧 모든 것이 너를 잊을 것이다." 아름답고 우울한 글이다. 하지만 여기서 철학은 무엇인가? 세계를 탐구하는 도구가 아니라, 권력의 무게를 견디기 위한 내면의 지탱대다.
그리스 스토아의 세계 시민주의는 로마에서 제국의 통치 이념으로 변형되었다. "모든 인간은 이성을 가진 존재로서 평등하다"는 원래의 급진적 명제가, "제국 내의 모든 자유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온건한 원칙으로 바뀌었다. 로마법의 '만민법(jus gentium)'―로마 시민이 아닌 사람에게도 적용되는 법―에 스토아적 보편주의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하지만 노예는 여전히 노예였고, 속주민은 여전히 2등 시민이었다. 질문은 제도에 흡수되면서 날을 잃었다.
키케로가 죽고, 스토아가 통치 이념으로 안착한 뒤, 로마 세계에 전혀 새로운 질문이 등장했다. 기독교였다.
1세기, 로마 제국의 동쪽 변방 팔레스타인에서, 나사렛 예수라는 유대인 목수가 가르침을 펼쳤다. 그의 가르침은 기존의 어떤 철학과도 달랐다. "원수를 사랑하라."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 철학의 논리로도, 로마의 실용으로도, 유대교의 율법으로도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 새로운 종류의 말이었다.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된 뒤, 그의 추종자들은 폭발적인 질문들과 맞닥뜨렸다. 예수는 정말 메시아인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는 무엇인가? 유대교의 율법은 여전히 유효한가? 이방인도 구원받을 수 있는가?
초기 기독교의 3세기는 질문의 시대였다. 오리게네스(185~254년경)는 그리스 철학의 방법론을 사용하여 성경을 해석했다. 성경의 문자 뒤에 숨겨진 알레고리적 의미를 찾으려 했다. 아리우스는 예수가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가 아니라 피조물이라고 주장했다. 아타나시우스는 격렬하게 반박했다. 이 논쟁은 수십 년간 기독교 세계를 뒤흔들었다.
이것은 진짜 질문이었다. 답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어느 쪽이 옳은지 아무도 확실히 알 수 없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아테네의 시민들처럼 진지하게 논쟁했다. 때로는 목숨을 걸고.
그러나 질문의 시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했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제국 전역에서 300명이 넘는 주교가 모여,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확정했다. 예수는 하나님과 동일 본질(homoousios)이다. 이것이 니케아 신경이다. 아리우스의 주장은 이단으로 선고되었다.
380년,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포했다. 391년, 이교 사원의 폐쇄를 명령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세라피스 신전이 파괴되었다. 415년, 알렉산드리아의 여성 철학자 히파티아가 기독교 군중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녀는 신플라톤주의 철학과 수학을 가르치던 사람이었다. 그녀의 죽음은, 그리스적 질문의 전통이 기독교적 답의 체계 앞에서 물리적으로 소멸되는 장면이었다.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가 되면서, 질문은 답으로 바뀌었다. "예수는 메시아인가?"―그렇다.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는?"―삼위일체. "어떻게 구원받는가?"―교회를 통해. 신경(Creed)이 만들어졌다. 이 신경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이단이었고, 이단은 추방되거나 처벌받았다.
이 과정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인물이 아우구스티누스(354~430년)다.
젊은 아우구스티누스는 끊임없이 질문하는 사람이었다. 악은 어디서 오는가? 시간이란 무엇인가? 자유의지는 존재하는가? 그는 마니교에 빠졌다가, 회의주의를 거쳤다가, 신플라톤주의에 끌렸다가, 마침내 기독교에 도달했다. 그의 『고백록(Confessiones)』은 이 지적 여정의 기록이며, 서양 문학 최초의 자서전이라 불린다. "주여,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하도록 만드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쉴 때까지 불안합니다." 이 유명한 첫 문장에 아우구스티누스의 전 생애가 압축되어 있다. 불안한 질문자가 마침내 답을 찾은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로 개종한 뒤, 아우구스티누스의 질문은 성격이 바뀌었다. 그는 여전히 질문했다. "악은 어디서 오는가?" 하지만 이제 그 질문의 답은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 안에서 찾아야 했다. 질문의 방향이 바뀐 것이다. 세계를 향해 열린 질문에서, 경전 안으로 향하는 질문으로. 이것은 한나라에서 "인이란 무엇인가"가 "이 경전의 이 구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로 바뀐 것과 구조적으로 동일하다. 새로운 신앙이 새로운 경전을 만들고, 새로운 경전이 질문의 범위를 한정한다. 동아시아에서 유교가, 로마 세계에서 기독교가, 거의 같은 시기에 거의 같은 과정을 거쳤다.
이제 3장의 전반부를 돌아보자.
로마는 질문을 필요로 하지 않는 문명이었다. "왜"보다 "어떻게"를, 철학보다 법률과 공학을 원했다. 키케로는 그 실용의 바다에서 질문의 등대를 지키려 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목과 손이 포럼의 연단에 전시되면서 그 시도는 끝났다. 스토아 철학은 살아남았지만, 세계를 향한 질문에서 자기 내면을 향한 위안으로 변형되었다. 기독교는 새로운 질문을 가지고 등장했지만, 제국의 종교가 되면서 질문은 교리로 닫혔다.
세 번의 기회. 세 번의 좌절. 질문은 로마라는 제국 안에서 번번이 자리를 잡지 못했다.
하지만 질문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다른 형태로, 다른 장소에서 살아남았다. 수도원의 필사실에서, 비잔티움의 도서관에서, 이슬람 세계의 번역 운동에서. 질문은 숨었다. 그리고 수백 년 뒤, 다시 깨어났다. 하지만 그 전에, 로마가 만들어낸 "질문 없는 교육"의 모습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질문이 불필요한 사회에서 교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 이야기를 다음에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