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의 역사] 3-3. 수사학

질문이 불필요한 사회의 교육

by 쑥갓선생

설득과 기술, 그리고 "왜"의 부재


서기 1세기, 로마의 어느 수사학 학교를 들여다보자.


열다섯 살쯤 된 소년들이 반원형으로 앉아 있다. 원로원 의원의 아들, 기사 계급의 아들, 부유한 상인의 아들. 앞에 레토르(rhetor), 수사학 교사가 서 있다. 오늘의 과제는 수아소리아(suasoria), 가상의 상황에서 누군가를 설득하는 연습이다. 교사가 제시한 상황은 이렇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인도 원정을 앞두고 있다. 그의 참모가 되어, 원정을 계속할 것인지 멈출 것인지를 조언하라."


한 소년이 일어선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손짓을 연습한 대로 천천히 펼치며 말하기 시작한다. "대왕이시여, 세계는 넓고 당신의 영광은 이미 충분합니다. 그러나 영광에 만족하는 자는 결코 위대해질 수 없습니다..." 교사는 소년의 어조, 자세, 논증의 구성, 감정 호소의 타이밍을 평가한다. 논증의 내용이 '옳은가'는 중요하지 않다. 다음 소년은 정반대 입장을 취해야 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설득의 '기술'이다.


이것이 로마 교육의 정점이었다. 수사학. 말하는 기술. 설득하는 기술.


아테네의 교실과 비교해 보자. 플라톤의 아카데미에서 학생이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 대화였다. 선생이 질문을 던지고, 학생이 답하고, 선생이 그 답의 모순을 지적하고, 학생이 다시 생각한다. "정의란 무엇인가?" "강자의 이익이 정의 아닌가?" "그렇다면 폭군의 통치도 정의인가?"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진리인가'였다. 설득이 아니라 발견이 목적이었다. 어떤 답이 옳은지는 대화가 끝나도 확정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질문하는 과정 자체가 교육이었으니까.


로마의 수사학 교실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묻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배심원에게 나의 주장이 정의롭다고 느끼게 만들 수 있는가"를 물었다. 진리와 설득 사이의 이 차이. 소크라테스라면 이것을 보고 무엇이라 했을까. 그는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자네들은 옳은 것을 찾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옳지 않은 것도 옳게 보이게 하는 법을 가르치고 있군."


로마의 수사학 교육은 체계적이었다. 소크라테스가 비판했을지 모르지만, 그 체계성만큼은 감탄할 만했다.

연설을 만드는 과정은 다섯 단계로 나뉘었다. 인벤티오(inventio), 논거를 찾는 단계. 디스포시티오(dispositio), 논거를 배열하는 단계. 엘로쿠티오(elocutio), 적절한 언어로 표현하는 단계. 메모리아(memoria), 연설 전체를 암기하는 단계. 악티오(actio), 실제로 발표하는 단계. 각 단계마다 세부 기법이 있었고, 학생들은 수년에 걸쳐 이 기법을 반복 연습했다.


특히 메모리아―암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로마인은 '기억의 궁전(method of loci)'이라는 기법을 개발했다. 머릿속에 건물을 떠올리고, 각 방에 연설의 논점을 배치한다. 연설할 때는 그 건물을 걸어 다니며 방마다 놓아둔 논점을 꺼내는 것이다. 이 기법은 오늘날에도 기억술 대회에서 사용될 정도로 효과적이다. 하지만 이것은 무엇을 위한 기술인가? 새로운 생각을 만들어내는 기술이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생각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기술이다.


수사학 교육의 또 다른 핵심 훈련은 콘트로베르시아(controversia)였다. 가상의 법정 사건을 놓고, 학생들이 원고와 피고를 번갈아 맡아 변론하는 연습이다. "한 아버지가 아들을 의절했다. 아들은 의사가 되어 아버지가 중병에 걸렸을 때 치료하여 살렸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원하는 것을 요구하라고 했다. 아들은 '의절을 취소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아버지가 거부했다. 아들이 소송을 제기했다." 학생은 아들 편에서도, 아버지 편에서도 변론해야 했다.


이 훈련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 보자. 같은 사건에 대해 양쪽 입장을 모두 변호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열린 사고를 기르는 훌륭한 훈련이다. 상대방의 논리를 이해하고, 자기 논리의 약점을 파악하는 능력.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위험한 훈련이기도 하다. 어느 쪽이든 설득력 있게 변론할 수 있다면, 진리는 어디에 있는가? 수사학의 세계에서는 진리보다 기술이 승부를 결정한다. 더 뛰어난 웅변가가 이기는 것이지, 더 옳은 사람이 이기는 것이 아니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것도, 어쩌면 그가 수사학적 기술보다 진리를 우선시했기 때문일 것이다.


퀸틸리아누스(35~100년경)는 이 문제를 의식하고 있었다. 그가 『웅변술 교육(Institutio Oratoria)』에서 제시한 이상은 '비르 보누스 디켄디 페리투스(vir bonus dicendi peritus)'―"선한 사람이면서 말 잘하는 사람"이었다. 기술만이 아니라 도덕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도덕'은 어디서 오는가? 퀸틸리아누스의 답은 철학적 탐구가 아니라, 좋은 로마 시민으로서의 덕목이었다. 법을 지키고, 의무를 다하고, 공적 책임을 수행하는 것. 진리를 탐구하여 스스로 도덕의 근거를 찾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이미 정해놓은 덕목을 체화하는 것. "왜 이것이 옳은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옳다"를 받아들이는 것.


법률 교육으로 눈을 돌려보자.


로마에서 법률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 초기에는 제도적 교육 과정이 없었다. 이미 활동 중인 법률가의 곁에서 견습(tirocinium fori)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젊은이는 존경받는 법률가의 집에 드나들며, 그가 법적 자문을 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법정에서 변론하는 것을 관찰하고, 판례를 필사하며 배웠다. 이것은 도제 교육이었다. 의사가 선배 의사를 따라다니며 수술을 보고 배우는 것과 비슷했다.


2세기에 이르면 좀 더 체계적인 법학 교육이 등장한다. 사비누스 학파와 프로쿨루스 학파라는 두 법학파가 형성되어, 각각 다른 해석 전통을 가르쳤다. 하지만 여기서도 핵심은 판례의 축적과 적용이었다. "이 사건에서 선례는 무엇인가?" "이전 판결은 어떤 원칙에 기반했는가?" "그 원칙을 이 새로운 사건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이 과정을 플라톤의 아카데미와 비교하면, 차이가 극명하다. 아카데미에서 학생이 "정의란 무엇인가"를 물었을 때, 플라톤은 학생을 데리고 정의의 개념을 처음부터 구축하는 여정을 떠났다. 개인의 정의, 국가의 정의, 영혼의 정의. 그 여정의 끝에서도 답은 확정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로마의 법학도가 "이 사건에서 정의로운 판결은 무엇인가"를 물었을 때, 스승은 이전 판례를 펼쳐 보여주었다. "율리우스 법에 따르면..." "가이우스의 법학 제요에서는..." 답은 텍스트 안에 있었다.


이것은 효율적이었다. 판례를 알고, 원칙을 이해하고, 새로운 사건에 적용할 수 있으면 유능한 법률가였다. 정의의 형이상학적 본질을 탐구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 효율성에는 대가가 있었다. 법체계가 다루지 못하는 새로운 유형의 문제가 등장했을 때,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했다. 판례가 없는 영역에서는 길을 잃었다.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편찬한 『로마법대전(Corpus Juris Civilis)』은 이 전통의 완성이자 기념비였다. 법학 제요(Institutiones), 학설휘찬(Digesta), 칙법휘찬(Codex). 1,000년에 걸친 판례와 원칙과 칙령이 하나의 체계로 정리되었다. 이것은 한나라의 오경 정전화와 비슷한 의미를 가진다. 흩어져 있던 지식이 하나의 공인된 텍스트로 수렴된 것이다. 이후 법학 교육은 이 텍스트를 읽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이 되었다. "왜 이것이 정의인가"가 아니라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에서 이 조항의 의미는 무엇인가."


공학과 기술 교육은 더욱 철저하게 "왜"를 배제했다.


로마 제국의 어딘가에서 수도교가 건설되고 있는 현장을 상상해 보자. 수백 명의 노동자가 돌을 나르고, 아치를 세우고, 수로를 깎고 있다. 현장을 감독하는 사람은 아르키텍투스(architectus), 건축가 겸 공학자다. 그는 어디서 이 기술을 배웠을까.


군대에서 배웠을 가능성이 높다. 로마 군대는 단순한 전투 조직이 아니라, 거대한 공학 조직이기도 했다. 군단이 진군하면, 매일 저녁 야영지를 건설했다. 해자를 파고, 방벽을 쌓고, 텐트를 정연하게 배치했다. 다리가 필요하면 며칠 만에 놓았다. 포위전이 필요하면 공성 기계를 제작했다. 군 공병대(fabri)에서 일하면서 건축과 공학을 실전으로 배운 것이다. 별도의 공학 학교는 존재하지 않았다. 교실이 아니라 현장이 학교였다.


비트루비우스(기원전 1세기)의 『건축 십서(De Architectura)』는 로마 공학 지식을 기록한 거의 유일한 텍스트다. 이 책에서 비트루비우스는 건물의 설계, 재료의 선택, 수도 시설, 기계 장치 등을 다루었다. 하지만 그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면, "왜"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이런 종류의 토양에서는 이런 기초를 사용하라." "물을 운반하려면 200분의 1 이상의 경사를 유지하라." "벽돌은 봄이나 가을에 만들어야 한다. 여름에 만들면 표면만 마르고 속은 젖어 있어 금이 간다." 모두 경험에서 축적된 실용적 지침이다. '왜' 200분의 1의 경사가 필요한지, '왜' 여름에 만든 벽돌이 금이 가는지에 대한 물리학적, 화학적 설명은 없다.


프론티누스(40~103년경)의 『수도에 관하여(De Aquaeductu)』도 마찬가지다. 로마 수도 감독관이었던 프론티누스는 로마의 11개 수도교 시스템을 상세히 기록했다. 각 수도교의 길이, 수원의 위치, 하루 공급량, 배관의 규격. 놀라운 정밀함이다. 하지만 "왜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가", "왜 이 직경의 관이 저 직경의 관보다 더 많은 물을 운반하는가"에 대한 이론적 설명은 없다. 알고 있는 것은 규칙이지, 원리가 아니었다.


이것을 같은 시기 알렉산드리아의 헤론(1세기경)과 비교하면 흥미롭다. 헤론은 그리스 전통의 학자였다. 그는 증기의 힘으로 작동하는 장치(아이올로스의 공)를 만들었고, 자동 문 개폐 장치를 설계했으며, 분수의 원리를 수학적으로 설명했다. 같은 기술이지만 접근 방식이 달랐다. 로마의 공학자는 "작동하는 것"을 만들었고, 그리스 전통의 학자는 "왜 작동하는지"를 설명하려 했다. 전자는 즉각적으로 유용했지만 전수가 어려웠다. 후자는 당장의 쓸모가 적어 보였지만, 원리를 이해하면 새로운 응용이 가능했다.


여기서 한 발 물러서서, 로마 교육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단어를 생각해 보자. 훈련(training)이다.


수사학 교육은 훈련이었다. 연설의 다섯 단계를 반복 연습하고, 가상 법정에서 변론을 되풀이하고, 연설문을 통째로 암기하는 훈련. 법률 교육은 훈련이었다. 판례를 외우고, 원칙을 적용하고, 새로운 사건을 기존 틀에 맞추는 훈련. 공학 교육은 훈련이었다. 선배 공학자의 기법을 보고 따라 하고, 경험적 규칙을 체득하는 훈련.

훈련(training)과 교육(education)은 다르다. 이 구분은 현대 교육학에서도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논쟁이다. 훈련은 이미 알려진 기술을 전수한다. 정해진 절차가 있고, 정해진 결과가 있으며, 숙달의 정도를 측정할 수 있다. 교육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을 탐구하게 한다. 정해진 절차가 없을 수 있고,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올 수 있으며, 측정이 어려울 수 있다. 로마는 전자에 압도적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이것이 결코 열등하다는 뜻은 아니다. 훈련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은 지적 허영이다. 잘 훈련된 법률가가 수천 건의 분쟁을 해결할 때, 그 실질적 가치는 "정의란 무엇인가"를 10년간 탐구한 철학자보다 클 수 있다. 잘 훈련된 공학자가 수도교를 지어 100만 명에게 깨끗한 물을 공급할 때, 그 실용적 가치는 "왜 물은 흐르는가"를 묻는 자연철학자보다 클 수 있다. 로마 문명이 500년간 지속되고, 그 유산이 2,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것은 이 훈련의 힘이었다.


하지만 훈련에는 한계가 있다. 훈련은 이미 존재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탁월하지만, 아직 존재하지 않는 문제를 예측하는 데는 무력하다. 훈련은 기존의 체계를 유지하는 데 효과적이지만, 체계 자체를 혁신하는 데는 무력하다. 로마의 수도교는 경이로웠지만, 수도교를 넘어서는 새로운 수자원 기술은 로마에서 나오지 않았다. 로마법은 위대했지만, 로마법의 전제 자체를 의심하는 법철학적 혁신은 로마에서 나오지 않았다. 로마의 수사학은 완벽했지만, 수사학 너머의 새로운 지식 생산 방법은 로마에서 나오지 않았다.


"왜"가 부재한 교육은 현재를 유지하는 데 최적화되어 있지만, 미래를 여는 데는 무방비하다. 이것이 로마 교육의 핵심 특성이자 핵심 한계였다.


이제 이 이야기를 현재로 가져와 보자.


오늘날의 교실에서, "왜"와 "어떻게"의 비율은 어떠한가? 대학의 경영학과에서 가르치는 것은 "왜 기업이 존재하는가"인가, "어떻게 이익을 극대화할 것인가"인가? 의과대학에서 가르치는 것은 "왜 인체는 이렇게 작동하는가"인가, "어떻게 이 질병을 치료할 것인가"인가? 로스쿨에서 가르치는 것은 "왜 이것이 정의인가"인가, "어떻게 이 사건을 이길 것인가"인가?


우리는 생각보다 로마에 가까이 살고 있을지 모른다. 실용성을 중시하고, 취업을 교육의 목표로 삼고, "왜"보다 "어떻게"를 가르치는 사회. 우리 안의 로마를 인식하는 것. 그것이 이 장이 묻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로마가 남긴 유산에는 "왜"의 부재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실용주의의 위대함과 한계, 법치의 전통, 그리고 "좋은 시민을 기르는 것이 교육의 목적인가"라는 질문 자체. 이 유산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다음에 더 깊이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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