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의 역사] 2-4. 공자

공자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을까

by 쑥갓선생

질문하는 철학자가 답을 가진 체계로 변했다


두 장면을 나란히 놓아보자.


첫 번째 장면. 기원전 5세기, 노(魯)나라 어딘가. 먼지 이는 길가에 공자가 제자들과 앉아 있다. 여행 중이다. 관직을 얻지 못해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떠돌고 있는 중이다. 제자 자로가 묻는다. "군자도 곤궁할 때가 있습니까?" 공자가 대답한다. "군자는 곤궁하더라도 뜻을 굳게 지킨다. 소인은 곤궁하면 아무 짓이나 한다." 자로는 불만스럽다. 표정이 좋지 않다. 공자가 그것을 알아채고 되묻는다. "자로야, 내가 가르친 것이 틀렸다고 생각하느냐? 우리가 이 꼴이 된 것이 내 가르침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하느냐?" 자로가 투덜댄다. "스승님의 도가 너무 크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래서 천하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좀 낮추시면 어떨까요." 공자가 웃는다. 슬프게 웃는다. "자로야, 훌륭한 농부가 반드시 풍년을 얻는 것은 아니다. 도를 잘 닦는다고 반드시 세상에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두 번째 장면. 15세기, 조선의 성균관. 유생들이 반듯하게 앉아 있다. 교관이 논어를 펼친다. "군자고궁(君子固窮), 소인궁사람(小人窮斯濫矣)." 교관이 주희의 집주를 읽는다. "군자는 곤궁하더라도 의리를 지키니, 이는 이(理)가 기(氣)를 주재하기 때문이다. 소인은 곤궁하면 방탕하니, 이는 기가 이를 가리기 때문이다." 유생들이 받아 적는다. 시험에 나올 수 있다. 자로의 불만스러운 표정도, 공자의 슬픈 웃음도, 먼지 이는 길가의 공기도 여기에는 없다. 있는 것은 텍스트와 주석, 그리고 정돈된 해석뿐이다.


같은 말이다. 하지만 같은 말이 아니다. 첫 번째 장면에서 공자의 말은 살아 있다. 곤궁하고 지친 여행길에서, 화가 난 제자를 달래면서, 자기 자신도 확신이 서지 않는 상태에서 간신히 꺼내는 말이다. 두 번째 장면에서 같은 말은 죽어 있다. 형이상학적 체계 안에 배열된, 정답이 확정된 텍스트다. 공자라는 인간은 사라지고, '공자'라는 권위만 남아 있다.


이 장에서 묻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우리가 아는 공자는 어느 쪽인가? 그리고 원래 공자는 어느 쪽에 가까웠는가?


논어를 편견 없이 읽어보면, 예상과 다른 인물을 만나게 된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공자는 위엄 있고, 온화하며, 모든 것에 답을 가진 성인이다. 하지만 논어의 공자는 훨씬 더 복잡하고, 인간적이며, 때로는 불안한 사람이다.


그는 화를 냈다. 제자 재여(宰予)가 낮잠을 자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썩은 나무는 조각할 수 없고, 더러운 흙벽은 회칠할 수 없다(朽木不可雕也, 糞土之牆不可杇也)." 그리고 덧붙였다. "처음에 나는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동을 믿었는데, 재여 때문에 이제는 사람의 말을 듣고도 그 행동을 살피게 되었다." 한 제자의 낮잠 때문에 인간관이 바뀌었다는 고백. 이것은 성인의 완벽한 가르침이 아니라, 스승의 솔직한 좌절이다.


그는 모른다고 말했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그것이 아는 것이다(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이 유명한 구절은 교과서에서 '겸손의 미덕'으로 가르쳐지곤 한다. 하지만 이것은 겸손이 아니다. 이것은 인식론적 선언이다. 확실하지 않은 것을 확실하다고 말하지 않겠다는 것. 무지의 영역을 정직하게 인정하겠다는 것. 소크라테스가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고 했을 때, 그것이 아테네의 모든 자칭 현자들에 대한 도전이었던 것처럼, 공자의 이 말도 마찬가지였다. 확실한 답을 가진 척하는 것을 거부하는 선언.


그는 기다렸다. "분발하지 않으면 열어주지 않고(不憤不啓), 답답해하지 않으면 이끌어주지 않는다(不悱不發)." 학생이 스스로 고민하여 답답해질 때까지 답을 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 교육학에서 말하는 '구성주의적 교수법'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지식은 교사가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학습자가 스스로 구성하는 것이라는 원리. 2,500년 전 공자가 이미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그는 '인(仁)'을 정의하지 않았다. 2-1장에서 보았듯이, 안연에게는 이렇게, 중공에게는 저렇게, 자장에게는 또 다르게 대답했다. 공자는 "나의 도는 하나로 꿰뚫는다(吾道一以貫之)"고 했지만, 그 '하나'가 무엇인지 끝내 직접 말하지 않았다. 제자 증자가 나중에 "충(忠)과 서(恕)일 것이다"라고 추측했을 뿐이다. '추측'이다. 확정이 아니다. 공자의 핵심 사상은 열린 채 남겨졌다. 그것은 약점이 아니라 방법이었다. 답을 닫지 않음으로써, 각자가 자기 삶 속에서 그 답을 찾아가게 하는 것.


논어의 공자는, 한마디로, 질문하는 사람이었다. 답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답을 함께 찾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주희가 등장하면서, 이 공자가 다른 공자로 바뀌었다.


주희의 공자는 모든 것에 답을 가지고 있다. '인'은 더 이상 열린 개념이 아니다. "인은 마음의 덕이자 사랑의 이치다(仁者, 心之德, 愛之理也)." 명쾌한 정의다. 인간의 본성은 선한가 악한가? 선하다. 왜? 본성은 이(理)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럼 왜 악이 존재하는가? 기(氣)가 탁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선해질 수 있는가? 격물치지로 이를 궁구하면 된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서를 읽고, 주석을 따라 해석하면 된다.


모든 질문에 답이 있다. 모든 문제에 해법이 있다. 이것은 하나의 완결된 체계이며, 그 체계의 출발점에 공자가 놓여 있다.


하지만 잠시 멈추어 생각해 보자. 주희는 12세기 사람이고, 공자는 기원전 5세기 사람이다. 그 사이에 1,600년이라는 시간이 놓여 있다. 주희는 공자가 살았던 시대를 직접 본 적이 없다. 논어라는 텍스트를 통해서만 공자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텍스트를 자기 시대의 철학적 틀―이기이원론, 성리학―로 읽었다.


이것은 마치 누군가가 21세기의 양자역학적 세계관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다시 해석하는 것과 비슷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상(form)'이라고 한 것은 사실 양자장의 정보 구조를 직관적으로 포착한 것이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을까?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정말 그렇게 생각했을까? 아닐 것이다. 마찬가지로, 공자가 "인이란 자기를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라 말했을 때, 그가 주희의 이기이원론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을 가능성은 없다.


주희는 공자를 구했지만, 동시에 공자를 가두었다. 논어의 대화가 성리학의 주석 속에 보존되면서, 공자의 말은 후대에 전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공자의 열린 질문은 주희의 닫힌 답으로 대체되었다. 살아 있는 대화는 죽은 교리가 되었다.


이 변화가 가장 철저하게 관철된 곳이 한국이었다.


1392년 건국된 조선은 처음부터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채택했다. 이것은 단순한 학문적 선택이 아니었다. 조선의 건국 세력은 고려의 불교 중심 체제를 뒤엎고 새 나라를 세운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성리학은 새 왕조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이념이자, 사회 전체를 재설계하는 설계도였다. 성균관이 세워지고, 각 지방에 향교가 설립되었으며, 사림(士林)이라 불리는 유학자 집단이 정치의 핵심 세력으로 부상했다.


조선 성리학의 두 거봉은 퇴계 이황(1501~1570)과 율곡 이이(1536~1584)였다. 이 두 사람의 논쟁을 살펴보면, 조선 성리학의 깊이와 한계가 동시에 드러난다.


이황은 이렇게 주장했다. 사단(四端)―측은, 수오, 사양, 시비―은 이(理)가 발(發)한 것이고, 칠정(七情)―기쁨, 노여움, 슬픔, 두려움, 사랑, 미움, 욕망―은 기(氣)가 발한 것이다. 이이는 반박했다. 이가 스스로 발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는 형이상학적 원리이므로 스스로 활동할 수 없다. 발하는 것은 언제나 기이며, 이는 기 위에 타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이기호발(理氣互發) 대 기발이승(氣發理乘)의 논쟁, 이른바 사단칠정 논쟁이다.


이 논쟁은 지적으로 정교하고 깊이가 있다. 인간의 도덕적 감정은 어디서 오는가? 이성과 감정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은 서양 철학에서도 데카르트, 흄, 칸트가 씨름한 핵심 주제다. 퇴계와 율곡의 논쟁은 이 보편적 철학 문제에 대한 동아시아의 독자적인 답변이었고, 학문적 수준에서는 중국의 성리학을 능가한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한 발 물러서 보면, 이 논쟁의 한계도 보인다. 퇴계와 율곡이 논쟁한 것은 주희의 체계를 더 정교하게 만드는 작업이었다. "이와 기의 관계는 정확히 어떠한가." 이것은 주희의 이기이원론을 전제한 질문이다. 주희의 체계 자체를 의심하는 질문―"이와 기라는 구분 자체가 타당한가?", "세계를 이해하는 다른 방식은 없는가?", "성리학 이외의 사상도 검토해 볼 가치가 있지 않은가?"―은 제기되지 않았다. 틀 안에서의 질문은 활발했지만, 틀 자체에 대한 질문은 부재했다.


그리고 이 틀 밖으로 나가려는 시도는 위험했다. 윤휴(1617~1680)라는 학자가 있었다. 그는 주희의 주석에 만족하지 않고, 중용에 대해 자기만의 독자적인 해석을 시도했다. "주희의 해석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나는 경전을 직접 읽고, 내 눈으로 이해하겠다." 이 태도는 서양 학문에서라면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에서 이것은 사문난적(斯文亂賊), 유교의 도를 어지럽히는 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윤휴는 결국 정치적 갈등 속에서 사사(賜死)되었다. 물론 그의 죽음은 순수하게 학문적 이유만은 아니었다. 정치적 당쟁이 결합되어 있었다. 하지만 '주희의 주석에 도전한다'는 것 자체가 정치적 무기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질문의 자유가 제도적으로 보장되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그러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조선 후기에 이르러, 마침내 틀 자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실학(實學)이라 불리는 새로운 흐름이었다. 이름 자체가 의미심장하다. '실(實)', 즉 실제, 현실, 실용. 성리학이 형이상학적 원리('이와 기의 관계')에 몰두하는 동안, 백성들은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기술은 정체되어 있었고, 청나라와 서양에서는 새로운 학문과 기술이 밀려오고 있었다. 실학자들은 물었다. "형이상학적 논쟁이 백성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가?"


정약용(1762~1836)은 실학의 정점에 선 인물이었다. 그는 놀라운 일을 했다. 주희의 주석을 걷어내고, 논어를 처음부터 다시 읽은 것이다. 정약용의 눈에 비친 공자는 주희의 공자와 달랐다. 정약용은 '인(仁)'을 형이상학적 원리가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관계 속에서 실천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인은 두 사람 사이(二人)의 관계다." 추상적 원리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구체적인 행위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임금과 신하 사이에서, 친구 사이에서 실천되는 것이다.


이것은 논어의 원문에 더 가까운 해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공자는 형이상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사람들 사이를 걸어 다니며, 구체적인 상황에서 구체적인 조언을 한 사람이었다. 정약용은 1,600년간 쌓인 주석의 층을 걷어내고, 그 아래에 묻혀 있던 원래의 공자를 발굴해낸 셈이다.


정약용은 경전 해석에 머물지 않았다.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지방 관리가 백성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다루었다. 세금 징수, 재판, 재난 구호, 공공 시설 관리. 형이상학이 아니라 행정학이었다. 그는 수원 화성을 설계할 때 거중기라는 기계를 고안하기도 했다. 서양 과학의 원리를 받아들여 실용적 문제에 적용한 것이다.


박지원(1737~1805)은 다른 방향에서 균열을 만들었다. 그는 청나라를 여행하고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썼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명나라가 멸망한 뒤에도 중화 문명의 정통이 조선에 있다고 자부했다. 청나라는 오랑캐의 나라이니, 배울 것이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박지원이 실제로 본 청나라는 달랐다. 도로는 잘 정비되어 있었고, 상업은 활발했으며, 벽돌로 지은 건물은 견고했다. 박지원은 물었다. "왜 우리는 오랑캐라고 업신여기면서, 그들의 좋은 것을 배우지 않는가?" 이것은 성리학의 틀 안에서는 나올 수 없는 질문이었다. 성리학의 세계관에서 중화와 오랑캐의 구분은 형이상학적 원리의 일부였으니까.


하지만 실학은 결국 주류가 되지 못했다. 조선의 지배 체제는 여전히 성리학 위에 서 있었고, 과거제도는 여전히 사서의 주석을 시험했다. 실학자들은 변방의 목소리였다. 정약용은 18년간 유배 생활을 했고, 박지원의 글은 조정에서 문체반정(文體反正)의 대상이 되었다.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것의 대가가 이토록 혹독한 사회에서, 대부분의 지식인은 안전한 주석의 세계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이 장의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공자는 정말 주희가 해석한 대로 생각했을까? 대답은, 거의 확실하게, 아니다. 논어의 공자는 모든 것에 답을 가진 체계적 사상가가 아니었다. 그는 길 위에서 제자들과 대화하며, 때로는 화를 내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나도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가르침의 힘은 체계에 있지 않았다. 상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변화하는 대화 속에 있었다. 안연에게는 이렇게, 자로에게는 저렇게. 그것이 공자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주희를 단순히 '왜곡자'로 치부할 수도 없다. 주희가 없었다면, 공자의 말은 체계 없이 흩어져, 어쩌면 역사 속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주희는 공자를 살렸다. 다만, 살리는 과정에서 공자를 바꾸어 놓았다. 살아 있는 대화를 완성된 교리로 바꾸어 놓았다. 이것은 보존의 역설이다. 무언가를 보존하려면 고정시켜야 하고, 고정시키는 순간 원래의 생명력은 사라진다. 나비를 표본으로 만들면 영원히 남지만, 더 이상 날지 못하는 것처럼.


이 역설은 동아시아만의 문제가 아니다. 소크라테스의 말도 플라톤의 대화편을 통해 전해졌는데, 플라톤이 기록한 소크라테스가 진짜 소크라테스인지는 2,400년간 논쟁거리다. 예수의 말도 복음서를 통해 전해졌는데, 복음서 기자들의 해석이 예수의 원래 뜻과 얼마나 일치하는지는 신학의 핵심 논쟁 중 하나다. 위대한 질문자의 말은 언제나 후대의 해석자에 의해 변형된다. 하지만 동아시아에서 이 변형이 특히 강력했던 것은, 주희의 해석이 과거제도라는 국가 시스템과 결합하면서 수백 년간 '유일한 정답'의 지위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동아시아 교육이 2,000년에 걸쳐 축적한 이 유산―암기의 전통, 텍스트 중심의 학문, 스승에 대한 복종―은 오늘날 우리의 교실에 어떤 흔적을 남기고 있을까. 새벽 자습실에서 단어를 외우는 학생의 입술 위에, 교수의 질문 앞에서 침묵하는 강의실의 공기 속에, "교과서에 없으면 안 나와요"라는 말 속에, 공자에서 주희로, 주희에서 과거제도로, 과거제도에서 수능으로 이어지는 긴 사슬의 끝자락이 보이지 않는가. 그 이야기를 다음 장에서 마무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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