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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를 정복하겠다던 그 날의 나에게

완벽한 계획과 불완전한 실행, 그리고 그 사이에서 배운 것들

by 공부수집호소인
영어 공부 시작.png


그날 아침, 눈을 떴는데 뭔가 달랐어요. 평소보다 의욕이 넘쳤거든요. 문제는, 그 의욕이 영어 공부를 향해 있었다는 거죠.


계획은 완벽했어요. 진짜로요. 스마트폰 메모장에 적힌 내 영어 정복 계획서를 보세요: "오전 7시 기상 → 단어 100개 암기 → 문법 2시간 → 리스닝 1시간 → 스피킹 연습 1시간 → 영어 일기 작성." 완벽하죠? 근데 그게 문제였어요. 계획만 했다는 게.


여러분도 아시죠? 그 기분. 뭔가 대단한 걸 할 것 같은데, 갑자기 방 청소부터 시작하는 그 감정. 제가 정확히 그랬어요. 영어 책을 펼치기 전에 책상 정리, 필기구 정리, 심지어 화분 물주기까지 했거든요. 내 머릿속 '미루기 원숭이'가 완전히 조종권을 장악한 상태였죠.


드디어 첫 번째 단어장을 폈습니다. "Apple - 사과." 오케이, 이건 아는데? "Banana - 바나나." 이것도 아는데? 그 순간 깨달았어요. 제가 산 건 초등학생용 단어장이었다는 걸.


인터넷 서점에서 "기초 영어 단어"라고 검색했을 때, 별점 5점짜리로 골랐는데... 별점을 준 사람들이 모두 7살이었나 봅니다. 아무도 나한테 그 책을 사라고 한 적 없었는데, 나는 굳이 그걸 선택했어요. 왜냐고요? 나니까요.


좋아, 그럼 인터넷 강의를 들어보자! 유튜브에 "영어 왕초보 탈출"이라고 검색했어요. 나왔어요. 진짜 많이. 문제는 어떤 걸 들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거였죠. 그래서 뭘 했냐면, 강의 고르는 데만 2시간을 썼어요. 2시간 동안 썸네일만 보고 있었다고요.


"이 강의는 너무 어려워 보이고, 저 강의는 너무 쉬워 보이고, 이건 선생님이 너무 진지해 보이고, 저건 너무 신나 보이고..." 내 뇌 속 '선택장애 괴물'이 완전히 날뛰고 있었어요. 결국 강의 하나도 안 듣고 점심시간이 됐죠.


점심 먹고 나서 생각했어요. "아, 그래. 나는 실전파야. 실제로 외국인과 대화해보자!" 그래서 뭘 했냐면, 언어교환 앱을 깔았어요. 프로필 사진도 신중하게 고르고, 자기소개도 구글 번역기 도움 받아서 멋지게 썼죠.


"Hello, I am Korean person who want to learn English very much. Please teach me!"


지금 보니까 문법도 틀렸네요. 근데 그때는 진짜 완벽한 영어라고 생각했어요.


앱에서 매칭된 외국인이 메시지를 보냈어요. "Hi! How are you?"


아, 이건 아는데? "I'm fine, thank you, and you?" 완벽하게 답했죠. 그런데 그 다음 메시지가 왔어요. "What do you like to do in your free time?"


그 순간, 제 머릿속은 마치 컴퓨터가 블루스크린 뜨는 것 같았어요. 아무것도 안 떠오르는 거예요. 'free time'이 뭐였지? 'like to do'는 또 뭐고? 결국 구글 번역기를 켰습니다.


"나는 자유시간에 뭘 좋아해서 하냐고?" 번역해보니까 취미가 뭐냐는 얘기였어요. 그래서 열심히 답장을 썼죠. "I like watching Netflix and eating chicken."


상대방이 답했어요. "Cool! What's your favorite show on Netflix?"


또 구글 번역기. 또 식은땀. 이런 식으로 계속 대화하니까, 제가 번역기와 대화하는 건지 외국인과 대화하는 건지 헷갈리더라고요. 결국 "Sorry, I have to go now. Nice talking to you!"라고 도망쳤습니다.


저녁 때쯤 되니까 완전히 지쳤어요. 하루 종일 영어 공부한다고 난리쳤는데, 정작 배운 건 'free time'이랑 'favorite show' 정도? 그것도 번역기로 배운 거라 진짜 아는 건지도 의심스럽고.


그때 깨달았어요. 내가 영어 공부를 하려는 게 아니라, 영어 공부하는 척을 하고 있었다는 걸. 단어장 고르기, 강의 찾기, 앱 깔기... 이 모든 게 실제 공부가 아니라 공부 준비였던 거죠. 마치 운동하러 헬스장 가서 운동복만 갈아입고 셀카 찍고 오는 것처럼.


그 순간, 내 뇌 속 '이성 조종사'가 드디어 조종간을 다시 잡았어요. "야, 너 지금까지 뭐 한 거야?"

다음 날부터 전략을 바꿨어요. 거창한 계획 세우지 말고, 그냥 하루에 영어 문장 하나씩만 외워보자. "How are you?" 말고 진짜 써먹을 수 있는 문장으로.


첫 번째로 외운 문장: "I don't understand, but I'm trying."


진짜 유용했어요. 외국인과 대화할 때마다 이 문장만 계속 썼거든요. (웃음) 상대방도 이해해주더라고요. "아, 이 사람은 모르지만 노력하고 있구나."


두 번째로 외운 문장: "Can you say that again, please?"


이것도 진짜 자주 썼어요. 뭔 말인지 하나도 모를 때마다. 근데 신기한 게, 몇 번 반복해서 들으니까 조금씩 들리기 시작하더라고요.


세 번째: "I think I understand what you mean."


이건 좀 허세였어요. 사실 전혀 이해 못했는데, 계속 "모르겠다" 하기가 미안해서. 근데 이렇게 말하고 나서 상대방 반응을 보면서 맞춰가는 재미가 있었어요. 마치 영어 버전 '몸짓 게임' 같은?


이런 식으로 한 달 정도 지나니까, 뭔가 달라졌어요. 완전히 유창해진 건 아니지만, 최소한 도망가지는 않게 됐거든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틀려도 괜찮다는 걸 깨달았다는 거예요.


어느 날 외국인 친구가 물어봤어요. "What's your biggest fear about learning English?"


그때 답했죠. "My biggest fear is... um... making mistakes. But now I think mistakes are my teachers."


완벽한 문법은 아니었지만, 제 진심이 담긴 답이었어요. 그 친구가 말하더라고요. "That's a very wise way to think!"


아, 그 순간 진짜 뿌듯했어요. 내가 영어로 철학적인(?) 대화를 했다는 게. 물론 여전히 대부분은 "Um... how do you say..." 이런 식으로 시작하지만요.


지금도 영어는 어려워요. 매일 새로운 벽에 부딪히고, 매일 새로운 실수를 해요. 어제는 "I'm exciting"이라고 했다가 웃음거리가 됐거든요. "Excited"여야 하는데. 근데 그래도 괜찮아요. 틀린 만큼 배우니까.


요즘은 영어 공부 방법도 바뀌었어요. 거창한 계획 대신, 그냥 재미있는 걸 영어로 해봐요. 좋아하는 드라마를 영어 자막으로 보거나, 관심 있는 유튜브 채널을 영어로 보거나. 물론 반의 반도 못 알아듣지만, 그래도 100% 모르는 것보다는 낫죠.


가끔 처음 영어 공부를 시작했던 그 날이 생각나요. 그때의 나는 진짜 순진했어요. 한 달만 열심히 하면 영어가 술술 나올 줄 알았거든요. 근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순진함이 시작할 수 있게 해준 원동력이었던 것 같아요.


만약 처음부터 "영어는 최소 몇 년은 해야 해"라고 알았다면, 시작도 안 했을 수도 있거든요. 무지한 용기, 이것도 나름 의미가 있었나 봐요.


영어 공부를 시작하려는 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완벽한 계획 세우려고 하지 마세요. 그냥 시작하세요. 틀려도 괜찮고, 어색해도 괜찮아요. 중요한 건 포기하지 않는 거예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팁 하나: 영어는 언어예요. 언어는 소통의 도구라고요. 문법이 완벽하지 않아도, 발음이 어색해도, 상대방이 내 마음을 이해해주면 그걸로 충분해요.


결국 저는 아직도 영어 공부 중이에요. 매일매일.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요. 빠르지는 않지만, 멈추지는 않았거든요.


그러니까 여러분도... 음... 그냥 지금 영어 공부나 시작해보세요. 저처럼 초등학생용 단어장 사지만 말고요.


아, 그리고 하나 더. 영어 공부하다가 포기하고 싶을 때는 이 문장 기억하세요: "I don't understand, but I'm trying."


저한테는 정말 마법 같은 문장이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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