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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단어 1만 개를 외우겠다던 그 야심찬 나에게

반복과 망각의 무한루프 속에서 발견한 단어들과의 기묘한 동거법

by 공부수집호소인
단어 외우기.png

그날 밤 12시, 침대에 누워서 갑자기 깨달았어요. 내가 아는 영단어가 고작 몇 개 안 된다는 걸. Apple, Banana, Thank you, Hello... 손가락으로 세어보니까 진짜 열 개도 안 됐어요. 그 순간 뭔가 뜨거운 게 가슴속에서 올라오더라고요. 분노? 아니에요. 야망이었어요.


"좋아, 나는 영단어 1만 개를 외울 거야!"


왜 하필 1만 개였냐고요? 그냥 큰 숫자니까 멋있어 보였거든요. 1천 개는 너무 작고, 10만 개는 너무 크고. 1만 개가 딱 적당해 보였어요. 근데 지금 생각해보니, 1만 개가 얼마나 많은 건지도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아요.


다음 날 아침, 서점으로 달려갔어요. 영단어 책 코너에서 30분 동안 서성였죠. "토익 필수 단어", "수능 영단어", "영단어 암기의 기술"... 선택지가 너무 많은 거예요. 결국 가장 두꺼운 걸로 골랐습니다. 왜냐고요? 두꺼우면 많이 들어있을 것 같잖아요.


집에 와서 펼쳐보니까... 와, 진짜 빽빽하더라고요. 페이지마다 단어가 50개씩. 총 800페이지. 계산해보니까 4만 개였어요. 1만 개 계획이 갑자기 4만 개로 업그레이드된 거죠.


첫날 계획: 하루에 100개씩 외우기. 100일이면 1만 개 완성! 완벽한 계획이었어요. 물론 책에는 4만 개가 들어있었지만, 일단 1만 개부터 차근차근.


"Abandon - 포기하다, 버리다."

오케이, 첫 번째 단어네요. 암기 완료!


"Ability - 능력."

이것도 쉽네요.


"Aboard - 탑승한."

음... 이건 좀 헷갈리는데? A-board? 에이-보드?


세 번째 단어에서 벌써 막혔어요. 그때 깨달았죠. 내가 단어를 '외우는' 게 아니라 '읽기만' 하고 있다는 걸.

그래서 전략을 바꿨어요. 각 단어마다 3번씩 쓰기! 손으로 쓰면서 입으로도 말하기! 감각을 다 동원해서 외우는 거죠.


"Abandon, abandon, abandon... 어밴던? 아밴던? 에이반던?"

발음도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3번씩 쓰니까, 틀린 발음이 3배로 각인되는 기분이었어요. 내 머릿속 '잘못된 학습 괴물'이 완전히 날뛰고 있었죠.


이틀째 되니까 문제가 생겼어요. 어제 외운 단어들이 기억이 안 나는 거예요. "Abandon"은 기억나는데, "Ability"가 뭐였더라? 능력? 가능성? 아니면 뭐였지?


그래서 복습 계획을 추가했어요. 새로운 단어 100개 + 어제 단어 복습 100개 + 그제 단어 복습 100개... 계산해보니까 일주일 후에는 하루에 700개를 봐야 하더라고요.


"이건 말이 안 되는데?"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어요. 이미 친구들에게 "나 영단어 1만 개 외운다"고 선언했거든요. SNS에도 올렸고요. "#영단어챌린지 #1만개외우기 #영어정복" 해시태그까지 달아서.


그래서 뭘 했냐면, 단어장 들고 다니기 시작했어요. 지하철에서, 카페에서, 화장실에서... 어디든 단어장을 펼쳤죠. 사람들이 보기에는 진짜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 같았을 거예요.


근데 실상은? 그냥 단어들을 쳐다보기만 하고 있었어요. "Accurate - 정확한"이라고 써있으면, "아, 정확한이구나" 하고 넘어가고. "Achieve - 성취하다"면 "아, 성취하다구나" 하고 넘어가고.


이게 외우는 건지 그냥 읽는 건지 구분이 안 됐어요. 내 뇌는 마치 단어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는 체 같았거든요.


3주차쯤 되니까 완전히 지쳤어요. 매일 새로운 단어 100개를 보는데, 어제 본 단어는 기억 안 나고, 그제 본 단어는 더더욱 기억 안 나고. 내가 뭘 하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외국인과 대화할 기회가 생겼어요. 드디어 그동안 외운 단어들을 써먹을 때가 온 거죠! 가슴이 두근두근했어요.


외국인: "What do you do for fun?"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단어들이 막 떠올랐어요. "Entertainment... Enjoyment... Recreation..." 와, 다 기억나네? 근데 문제는 이 단어들로 어떻게 문장을 만들어야 할지 모르겠는 거였어요.


"I... entertainment... um... enjoyment... recreation?"

완전히 로봇 같았죠. 단어는 아는데 문장이 안 나오는 거예요. 마치 요리 재료는 다 있는데 요리법을 모르는 것처럼.


그때 깨달았어요. 내가 단어를 '외우고' 있는 게 아니라 '수집'하고 있었다는 걸. 포켓몬 카드 모으듯이, 단어들을 그냥 머릿속 박스에 넣어두기만 했던 거죠. 실제로 쓸 줄은 모르면서.


그 날 밤, 전략을 완전히 바꿨어요. 단어만 외우지 말고, 문장으로 외워보자!


"Abandon"이면 "Don't abandon your dreams." 이런 식으로. "Achieve"면 "I want to achieve my goal." 이런 식으로.


처음엔 어색했어요. 문장 만들기가 단어 외우기보다 훨씬 어려웠거든요. 하지만 신기한 일이 일어났어요. 문장으로 외운 단어들은 잘 잊어버리지 않더라고요.


왜냐하면 그 단어가 어떤 상황에서 쓰이는지 맥락이 있으니까. "Abandon"을 그냥 "포기하다"로 외울 때는 금방 까먹었는데, "Don't abandon your dreams"로 외우니까 꿈을 포기하지 말라는 상황과 함께 기억되는 거예요.


그리고 또 하나 깨달은 게, 모든 단어를 다 외울 필요가 없다는 거였어요. 정말 자주 쓰이는 핵심 단어 몇백 개만 제대로 알아도 충분히 대화할 수 있더라고요.


예를 들어 "Magnificent"라는 단어를 외웠다고 해봐요. 멋진 단어죠. 하지만 실제 대화에서는 "Great"나 "Amazing" 정도면 충분한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굳이 어려운 단어를 쓰려다가 틀리느니, 쉬운 단어로 정확하게 표현하는 게 나은 거죠.


4주차부터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공부했어요. 하루에 새로운 단어 10개만. 대신 각 단어로 3개씩 문장 만들기. 그리고 그 문장들을 실제로 써먹어보기.


"Confused - 혼란스러운"을 배웠으면, "I'm confused about this problem", "The instructions are confusing", "Don't confuse me with my brother" 이런 식으로 3개 문장을 만들고, 실제로 그날 하루 중에 혼란스러운 상황이 생기면 이 단어를 써보는 거예요.


처음엔 부자연스러웠어요. 한국어로 말하다가 갑자기 "Oh, I'm so confused!"라고 하니까 친구들이 웃더라고요. 하지만 점점 자연스러워졌어요.


그리고 발견한 건, 단어를 '외우는' 게 아니라 '사귀는' 거라는 거였어요.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단어와도 친해지는 시간이 필요한 거죠. 처음엔 어색하지만, 자주 만나다 보면 친해지는.


예를 들어 "Appreciate"라는 단어와 친해지는 과정을 보세요.


1일차: "Appreciate - 감사하다, 가치를 인정하다" (어? 이런 뜻이구나)

3일차: "I appreciate your help" (아, 이렇게 쓰는구나)

1주차: "I really appreciate it when people are on time" (좀 더 복잡한 문장에서도 쓸 수 있네)

2주차: "You don't appreciate what you have until it's gone" (아, 이런 철학적인 문장에서도 쓰이는구나)


이런 식으로 단계별로 친해지는 거예요. 급하게 하루에 100개씩 만나려고 하니까 아무도 기억 안 났던 거죠.

그리고 또 중요한 발견: 단어들끼리도 친구가 있다는 거였어요. "Happy"를 배우면 자연스럽게 "Sad", "Excited", "Disappointed" 같은 감정 단어들이 따라오고. "Big"을 배우면 "Small", "Huge", "Tiny" 같은 크기 단어들이 딸려오고.


이렇게 패밀리로 묶어서 외우니까 훨씬 효율적이었어요. 하나 배우면 다섯 개가 따라오는 느낌?


6개월 정도 지나니까 뭔가 달라졌어요. 영어 문장을 볼 때 모르는 단어가 나와도 당황하지 않게 됐거든요. 앞뒤 문맥으로 대충 짐작할 수 있게 된 거예요.


그리고 가장 큰 변화는, 단어를 '공부'하는 게 아니라 '사용'하게 됐다는 거였어요. 새로운 단어를 배우면 그 즉시 문장으로 만들어보고, 실제 상황에서 써보려고 노력하고.


어느 날 단어장을 다시 펼쳐봤는데, 처음 페이지에 적힌 "Abandon"을 보는 순간 웃음이 나더라고요. 이 단어와 처음 만났던 그 어색하고 서툰 시절이 생각나서.


지금도 새로운 단어들을 계속 만나고 있어요. 하지만 예전처럼 급하게 외우려고 하지는 않아요. 그냥 자연스럽게 친해지려고 해요. 어떤 단어는 금방 친해지고, 어떤 단어는 시간이 좀 걸리고. 그것도 나름의 매력인 것 같아요.


여러분도 아시죠? 그 기분. 새로운 단어를 배웠는데 다음 날 까먹는 그 절망감. 하지만 그게 정상이에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몇 번 만나야 이름을 기억하잖아요. 단어도 마찬가지예요.


중요한 건 포기하지 않는 거예요. 까먹어도 괜찮고, 틀려도 괜찮고. 다시 만나면 되는 거니까.


그리고 한 가지 팁: 단어를 외울 때 꼭 소리 내서 읽어보세요. 눈으로만 보면 스펠링은 기억해도 발음을 모르는 경우가 많거든요. 실제로 말할 때 당황하게 돼요.


제가 가장 부끄러웠던 경험이, "Colonel"이란 단어를 "콜로넬"이라고 발음해야 하는데 "코로넬"이라고 했던 거예요. 철자만 보고 외웠더니 완전히 틀린 발음으로 기억한 거죠.


요즘은 단어장보다 실제 영어 콘텐츠에서 단어를 만나는 걸 더 좋아해요. 드라마, 유튜브, 팟캐스트... 실제 상황에서 쓰이는 걸 보니까 단어가 살아있는 느낌이거든요.


예를 들어 "Procrastinate"라는 단어를 단어장에서 만나면 그냥 "미루다"라는 뜻으로 외우고 끝이에요. 하지만 유튜브에서 "Stop procrastinating and start studying!"이라는 문장으로 만나면, 아,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쓰는구나 하고 생생하게 기억되는 거죠.


결국 깨달은 건, 영단어 외우기는 마라톤이지 단거리 달리기가 아니라는 거예요. 빨리 많이 외우려고 하면 금방 지치고 포기하게 돼요. 천천히, 꾸준히, 그리고 재미있게 하는 게 답인 것 같아요.


지금 제 목표는 더 이상 "1만 개 외우기"가 아니에요. 그냥 "오늘 만난 새로운 단어와 친해지기"예요. 훨씬 현실적이고 부담 없잖아요?


그러니까 여러분도... 음... 영단어 때문에 스트레스받지 마세요. 단어들도 결국 우리 편이 되고 싶어하는 친구들이거든요.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친해져 보세요.


아, 그리고 "Serendipity"라는 단어 아세요? "뜻밖의 발견"이라는 뜻인데,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영단어예요. 영단어 공부하면서 예상치 못한 재미를 발견한 것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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