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 미끄러지듯이 시골길을 달립니다. 오늘 쏟아진다고 했던 장맛비는 아직 멀어 보입니다. 뭉게뭉게 뭉쳐있는 구름은 언제 먹구름으로 변할지 모르겠습니다. 구름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에 문득 9월의 어느 날이 떠오릅니다. 주무관님과 처음으로 함께 했던 행사 말입니다.
기억하시나요? 푸릇한 잔디 사이로 이름도 모르는 들꽃은 참 예쁘게도 피어 있었습니다. 우리 둘은 그날 진행해야 할 연수를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현수막을 걸고 의자와 책상을 맞추어 놓고, 중간중간 선생님들이 드실 간식도 보기 좋게 놓아두었습니다. 행여 연수 시간에 맞추지 못할까 싶어 서둘러 나간 덕에 한 시간여 시간이 남았지 뭡니까.
연수에 참여할 선생님들을 기다리며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개울가 둔덕 자전거길을 좀 걷기도 하면서요. 무엇을 좋아하는지, 휴일엔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이전 직장은 어디였는지, 지금은 만족하는지…. 취미며 일상이며 이것저것 서로 조곤조곤하게 주고받는 이야기는 우리를 저 산등성이 어딘가쯤에 데려다 놓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들꽃들 사이에 앉아 서로 사진을 찍어주었습니다. 참 의외였다지요. 서른을 갓 넘은 사내가 이런 꽃을 이뻐하다니요. 손으로 꽃받침을 만들어 얼굴을 괴고 미소도 짓고 눈도 감으며 찍은 주무관님의 사진은 아직 저의 갤러리에 저장되어 있습니다. 주무관님은 참 오랜만의 외근이었고 저는 참 오랜만의 망중한이었습니다.
일상경비라는 이름도 낯선 일을 하는, 누구든 편하게 부르는 과서무라는, 업무인지 자격인지 모르는 그 일을 하느라 주무관님은 밖에 나가본 적이 별로 없다고 했습니다. 교육청을 옮겨 온지 얼마 안된 저는 누군가의 도움이 참 필요했고요. 우리 둘은 그렇게 첫 행사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이후로도 주무관님은 저의 행사를 지원해주었습니다. 언제든 도울 일은 말씀 주시라는 주무관님의 뜻이 저는 더 고마웠습니다. 그 한때를 지우기가 참 싫은 까닭입니다.
서로가 다른 곳에서 다른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 함께 일을 한다는 건 많은 인내와 소통이 필요한 일입니다. 저는 주무관님에게 장학사가 어떻게 되는 건지 한참을 설명했고, 주무관님은 또 교육행정에 어떻게 입직하였는지를 말해주었습니다. 더불어 수능 사회탐구영역에서 1등급을 받았다고 자랑도 했지요. 전직 사회과 교사였던 저는 주무관님의 학력을 또 칭찬해주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아요. 사회구조며 조직문화며, 특히 주무관님의 패션 아이템들까지도요.
장학사로 들어와 교육청을 전전하며 이제 와 드는 생각은 말입니다. 사람 하나입니다. 한 사람만 있다면 거친 파고에 잠겨 허우적댈지언정 손을 뻗을 수 있더군요. 이제 떠나는 주무관님에게 교육행정이라는 조직 속에서 어떤 무언가가 웅크리고 있다가 나타날지 모르겠어요. 좋은 일일 수도 있고요, 몸서리쳐지게 나쁜 일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일 나쁜 일이라면 그때는 이렇게 어느 가을 함께 했던 망중한의 꽃밭을 기억해주면 좋겠습니다.
오늘 출장길은 혼자입니다. 이제 청을 떠나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난 주무관님을 저 좋자고 동행을 바랄 수는 없겠지요? 많이 서운합니다. 아쉽고요. 이제 더이상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저는 주무관님이 떠난 자리에 새로 올 주무관님을 성심껏 돕겠습니다. 주무관님이 저에게 그러했듯 차근히 우리 청의 이야기들을 나누어 주겠습니다. 늘 감정의 기복 없는 편안함을 선사하려구요. 화는 당최 짜증 한번 내지 않던 주무관님을 따라하는게 잘 되려나 모르겠습니다.
이제 정말 장맛비가 내리려나 봅니다. 마른번개와 천둥이 먼저 옵니다. 햇살 좋은 가을에 주무관님을 보내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함께 행사 현수막을 달지 못하게 되어 더더욱이요. 신규 발령 이후 처음으로 전보 발령으로 이동해서 설렌다는 주무관님의 달뜬 표정이 오래오래 제 마음에 남아있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