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날에 즈음하여..
'어 이거 뭐지?'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마지막이 to 'oo에게' 로 끝났다.
궁금증은 꼬리를 물었지만 달리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자뻑의 행복한 상상은 여름방학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매일매일 한편씩 배달되는 그 엽서 한 장을 기다리느라 나는 온 여름방학을 다 써버렸다. 혼자 낭독도 하며 달뜬 처녀마냥 무단히 발그레해지곤 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대문 밖으로 나가 우편함을 보는 게 일이 되었다. 아니 일이라니 가당찮다. 행복한 일상이었다. 그 엽서로 방학이 마무리될 때까지 보내는 이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 딱히 누군가를 만나지 않더라도 사랑 가득한 연시들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하고 또 행복했다. 언젠가 그래도 나타나겠지는 했더랬다. 이렇게 주소까지 알고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 런. 데.
누군가가 모둠일기장에 그 연서에 대해 적어놓은 것을 보.았.다! 이런 우리반 놈이었어. 이, 씨!!! 20대 후반 달뜬 여선생님의 마음을 한달여동안 흔들어놓은 놈이 우리반 놈이었다고!! 이런, 이런, 이런!!!
나는 확 기분이 상하려다가 절망했다. 나를 보고 있다고 생각했던 상상속의 그이가 없어진 것이었으니까. 뭔가 심장이 총맞은것처럼 아팠다가 또 다시 절망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서서히 분노로 바뀌고 있었다. 그 때 살며시 누군가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우리반 전00이었다.
"선생님 엽서 잘 받으셨어요? 어떤 웹사이트에서 사랑의 편지를 보내는 이벤트 한다길래 선생님 주소쓰고 한번 응모해봤어요. 잘 받으신거 같네요."
당황해하는 내 얼굴 표정을 쓰윽 훑는 녀석에게 나는 순간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럼에도 녀석의 옅은 미소에는 알듯말듯한 약간의 놀림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모둠일기를 제출하고 가방을 휙 둘러 사라지는 녀석의 마지막 미소는 그래도 따뜻했다(고 믿고 싶다.)
필시 녀석은 얼굴도 평균 이하의 담임이 남친도 없이 지내는 것이 불쌍해 보였는지,, (아마도 그랬던 것 같다.^^) 1년 동안 담임을 잘 보살펴 주었다. 내가 아프다고 하면 모둠일기장에 한약 한봉지도 붙여서 책상위에 올려놓곤 했다. 반 애들 때문에 화가 나거나 속이 상하는 날에는 그 녀석이 위로를 해주곤 했다. 어떤 때는 친구같은 느낌도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녀석도 고작 고1, 열일곱일 뿐인데 속이 무척 깊었던 아이였던 것 같다. 어디서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하긴 하다. 우편함이 있다면 다시 그 연서들을 받아보고 싶기도 하다. 이제 와서 할 수 있는 말이지만 그 연서가 나에게 추억을, 아름다운 인생의 한페이지를 남겨주었다는 걸 만나면 녀석에게 꼭 이야기해주고 싶다. 이 글을 녀석이 보려나??
이상 기온으로 올해 스승의 날은 유달리 덥다. 뉴스에서는 교직만족도가 조사를 시작한 이래로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다는 말뿐이다. 그래도 이렇게 누군가에게는 기억하고 싶은 날이다. 매스컴의 촌지 문제 따위로 덮힐 날이 아니다. 나는 안다. 선생님의 가슴 한 가운데를 뻥 뚫어 놓을 줄 아는 위트와 재치가 있는 학생들과 함께 해서 행복한 날들이 있었다는 것을. 뛰는 가슴을 늘 다잡고 싶은 그런 날이 내년에도 또 올것이고, 나는 매년 설레리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