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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고재비 Jun 02. 2019

2019년 5월의 월기

이렇게 한 달은 또 추억이 되었다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여 있는 비취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오월- 피천득 




5월의 하루는 갓 세수를 한 청신한 얼굴과 같았다 


간만에 날씨가 좋은 날들이 이어졌다. 지난 겨울 다들 다시는 볼 수 없을 줄로 알았던 파아란 하늘이 여러 날에 걸쳐 일렁였다. 지리산의 계곡에서나 느낄 수 있던 시원하고 맑은 바람도 강남 한복판에 심심치 않게 불었다. 집 안 에서는 종일 창문을 열어 놓았고,  평상시엔 바쁘게 후다닥 걸었던 거리에서 조금 속도를 늦추고 시원하게 날아가는 머리칼을 이리 저리 흔들어 보기도 했다. 


5월은 슬픈 메시지를 받으면서 시작했다 


5월은 오래된 친구에게서 슬픈 메시지를 받으면서 시작 되었다. 때 아닌 아침 7시에 도착한 메시지. 결혼을 준비하던 남자친구와 헤어지게 되었다는 덤덤한 메시지는 너무 덤덤한 나머지, 그녀의 지난밤이 얼마나 또렸했을지 되려 상상이 될 지경이었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관계를 맺고 끊는 것이 익숙해질만큼 익숙해진 30대 초중반의 나이들. 만남과 헤어짐의 프로토콜에 따라 겉으로는 성숙하게 척척 처리해내지만, 시린 마음이야 영원히 익숙해지지 않을 터였다. 일주일 뒤, 서래마을에서 우리만 알던 조용하고 멋진 스페인 레스토랑에서 와인 한 병을 시켜놓고 그 간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으로 위로를 했다. 슬프지도 구질구질하지도 않게. 해가 슬며시 넘어가던 그 날의 공기는 맑은 얼굴 같던 5월의 여러 날 중에도 가장 청량했다. 


5월은 야근을 하면서 마무리 했다 


5월의 중순을 넘어가면서, 야근 또는 조근이 일상이 되었다. 작년 말부터 기획해왔던 프로젝트를 세상에 드러낼 날이 손으로 셀 수 있을만큼 가까워 졌다. 팀원들을 재배치 하고 인력 지원을 받으면서, 그간 소수의 사람들이 빠르게 고민하고 최선이라고 판단하던 방식에서 빠르게 벗어나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럴 수 밖에 없어서, ' 제 때 해 놓지 못한 문서화가 족쇄를 크게 잡았다. 새롭게 일에 투입되는 사람에게 모두 비슷한 방식으로 일을 설명해주어야 하고, 비슷한 일을 반복해서 하거나 아무도 하지 않아 구멍이 나는 일이 없는지 살펴보느라, 어깨의 힘이 빠질 날이 없었다. 요일 별로 잡혀 있던 정기 미팅과 갑자기 생긴 보고 같은 것들을 준비하느라 본질적인 고민을 놓치고 있는 게 아닌지, 하루가 끝나고 나면 괴로운 날이 며칠 반복 되었다. 


바라던 것 중 실현된 것이 많았다 


그럼에도 '열일' 만큼 성과를 얻기 위해 확실한 길은 없는 것 같다. 사실상 5월은 세상이 나를 도와주는 한 달 이었다. 작년부터 부족한 능력으로 꾸역꾸역 끌어왔던 Women Who Code Seoul이 공식으로 런칭했다. 오랫동안 멋지게 해내고 싶었는데, 소망을 오래하면 현실이 된다는 것을 배웠다.


Women Who Code Seoul의 네트워크 런칭


바라지도 않았던 일도 저절로 되었다 


네트워킹 행사는 Google Campus for Startups 의 공간 후원과 여러 가지 도움으로 규모 있는 행사로 치를 수 있었다. 감히 해낼 수 있을까 싶었던 규모로 일이 커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여성을 위한 커뮤니티를 키우는 것은 이 세상이 '지금 원하는 일'이라는 확신을 받았다. 이 와중에 존경하던 분에게서 Women Who Code Seoul의 공식 후원도 받았다. 이 모든 게 계획에도 없었고, 예상치도 못했던 것들이었다. 온 세상이 나를 도와주고 있다는 느낌으로 하루가 가득했다. 


전혀 연고가 없던 사람에게서 첫 번째 원고 기고 문의도 들어왔다. 한 때는 취업을 하고 싶었던 곳에서 강의 요청도 들어왔다. 작년에 꾸역 꾸역 썼던 e-book을 읽고, 출판사를 통해 연락을 해 온 것이었다. 국내에서 가장 큰 교육회사와도 미팅을 했다. 정부 모 기관에서 포럼 연사로도 초청을 해 주었다. 좋은 제안이 참 많았다. 1년 전의 나라면 상상할 수 없던 하루를 보내고 있다. 


아, 나만 좀 더 잘할 수 있다면. 


정신 없고 아쉬운 와중에도 대자연은 완벽했다 


틈날때 마다 걷거나 달리는 탄천은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날들이 많았다. 탄천 곳곳은 여름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애견 놀이터의 흙을 재정비하거나, 어린이들이 놀 수 있는 얕은 풀장을 공사하는 것이다. 중간 중간 공사하는 구간이 있어 성가실 만도 한데, 날씨가 너무 좋아서 어린 아이나 나이 드신 분들도 운동화를 묶어 매고 다들 산책로에 나왔다. 신나게 궁둥이를 흔들어내는 강아지들도 완벽한 대자연의 일부였다. 


탄천은 거의 1년 내내 물이 거무튀튀한데, 5월의 어느날들은 이렇게나 물이 맑았다
아침 6시. 이 시간에만 볼 수 있는 따뜻한 색감의 햇살이 있다
바위 사이로 물이 부숴지는 소리는, 아무리 들어도 지겹지가 않다




사람들과 함께 했던 5월의 시간들은 소중했다 


5월을 열었던 연휴는 고향에서 가족들과 보냈다. 낮에는 낭만 고양이와 뒹굴거리다가 일하다가를 반복하고, 저녁에는 일과를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와 맥주 한 잔 나눴던 날들이 좋았다. 

경주의 낮과 밤. 내가 사랑하는 고양이와 부모님


점심시간 마다, 팀원들과 함께 나눠먹는 미식들은 일상을 살아가는 힘이다. 강남역 11번 출구에 있는 '갓덴스시'의 스시 추천 메뉴는 저렇게 커다란 장어가 올라가고, 회사 뒷골목 바로 뒤에 있는 'Bite 2 Heaven' 수제버거 집은 소고기 패티가 환상적이다. 야근 챈스를 틈타, 잠 깬다는 핑계로 핫하다는 'Tiger Sugar' 밀크티도 누구보다 빨리 접해본다. 바쁜 와중에도 뭘 먹을지 고민하며 미식을 하는 날들이 좋았다. 


비싸도 후회없는 강남역 메뉴들


이렇게 날씨가 좋고 선선할 때는 밤 공기도 마셔줘야 한다. 신논혁 아디다스 건물 꼭대기에 있는 'Roof 808'은 강남대로를 내려다볼 수 있는 야경 명소였다. 저녁까지 제법 거센 비가 내려서 라운지는 포기할 수 밖에 없었지만, 집에 가려고 하니, 비가 싸악 그쳐 버리는 마법. 방금 전까지 비가 내리고 청량한 공기가 가득한 옥상을 즐겼던 그 날이 참 좋았다. 


Roof 808 의 루프탑바와 야경 명소. 사진은 일행이 찍어서 보내준 것.


이태원의 힙한 건물인 현대카드 라이브러리와 맥심 플랜트 사이길로 내려간 뒷골목도 새로웠다. 뒷골목의 맛집으로 안내 받는 것도 소소한 인생의 기쁨. 저렴한 스테이크를 다양한 소스와 함께 맛볼 수 있는 '골든불'에서 10년 지기를 1년 반 만에 조우했다. 비슷한 분야에서 계속 스치듯이, 그렇지만 각자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아 해내고 있는 우리들. 처음 만났을 때가 22살이었다니. 10년 지기와 아무 얘기나 툭툭 던질 수 있었던 그 하루는 참 좋았다. 


이태원은 역시나 힙플레이스 였다


2019년 5월, 

많은 날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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