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집이 무너질 수 있다는 걸 안다

『5살부터 PTSD,ADHD,조울증』1부 PTSD,트라우마 편 4편

by 조영철

중학생 시절, 제게 집은 늘 안전한 공간은 아니었습니다. 평범한 날도 있었고, 웃음소리가 들리는 순간도 분명 있었습니다. 그러나 술이 개입되는 순간, 집은 전혀 다른 공간으로 변했습니다. 평범했던 집이 갑자기 무너져 내리고, 안전해야 할 울타리가 순식간에 지옥처럼 바뀌었습니다. 제 기억 속 트라우마는 바로 그 순간마다 깊이 새겨졌습니다.


무거운 공기와 긴장의 몸

집 안의 공기는 술이 들어오면 무거워졌습니다. 작은 말씨름도 곧 고성으로 번졌고, 아무 말이 없을 때조차 긴장된 침묵이 흘렀습니다. 방문이 닫히는 소리, 발자국 소리 하나에도 온몸이 움찔했고, 제 귀는 늘 긴장 속에서 소리를 먼저 잡아냈습니다. 몸은 긴장을 풀 줄 몰랐고, 마음은 언제 터질지 모를 폭풍을 대비하며 도망칠 길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집은 더 이상 머무는 곳이 아니라, 버텨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PTSD와 침습(intrusion)

그때의 저는 알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게 무서운지, 왜 사소한 소음에도 심장이 요동치는지. 훗날에야 알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PTSD, 트라우마의 한 증상이었다는 것을요. 안전해야 할 공간에서 반복적으로 두려움을 경험하면, 아이의 마음속 깊은 곳에 ‘집=위험’이라는 회로가 새겨집니다. 그 회로는 쉽게 사라지지 않고, 일상 곳곳에서 **침습(intrusion)**이라는 형태로 되살아납니다. 술 냄새만 맡아도, 문이 세게 닫히는 소리만 들어도, 제 몸은 자동으로 긴장했습니다. 현재가 아닌 과거가 몸속에서 침입해오는 경험. 그게 바로 트라우마였습니다.


평범함을 가려버린 강렬한 기억

그러나 집이 항상 지옥 같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평범한 저녁 식탁도 있었고, 엄마가 챙겨준 따뜻한 밥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기억보다 더 선명하게 남아 있는 건, 술에 물든 날들의 공기였습니다. 평범했던 날들을 가려버릴 만큼 강렬하게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결국 저의 트라우마는 집 자체가 아니라, 술이 만들어낸 집의 변화를 중심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리던 아이

집이 지옥 같았던 순간 속에서, 저는 살아야겠다는 다짐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렸습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순간에도, 침대 위에서 눈을 감는 순간에도, 저는 단지 그 시간이 흘러가기만을 바랄 뿐이었습니다. 학원에 있는 시간이 오히려 더 평화롭게 느껴졌습니다. 형광등 불빛 아래서 문제를 풀고, 선생님 목소리를 듣는 그 지루한 시간이 저에겐 피난처였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집 바깥이 더 안전한 공간처럼 느껴졌습니다.


증언으로 남기고 싶은 말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의 저는 단순히 살아남으려 했던 것이 아니라, 그저 시간을 견디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너지는 환경 속에서 제 안의 작은 본능이 “조용히 흘러가라”는 목소리를 내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그 시절의 저에게 말할 수 있습니다. “너는 잘못한 게 없어. 너는 그냥 그 시간을 버텼을 뿐이야.”

이제는 압니다. 집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아이가 ‘존재 자체로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곳이라는 것을요. 아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저 존재만으로 존중받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아이들이 여전히 집에서 긴장하며 살아갑니다. 집이 지옥이 되어버린 채 자라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 사실을 증언하고 싶습니다.

저는 여전히 회복 중이지만, 적어도 제 이야기를 통해 이 사실만큼은 분명히 남기고 싶습니다. 아이에게 집이 지옥일 수 있다는 걸 나는 안다. 그렇기에 더 이상은, 그 어떤 아이도 집을 두려워하며 자라서는 안 된다. 이것이 제가 살아남아 전하고 싶은 증언입니다.




이 글은 『5살부터 PTSD,ADHD,조울증』 시리즈 1부, 트라우마 편의 4편입니다.

아직 회복 중인 마음으로, 17년간의 흔적을 조심스럽게 꺼내고 있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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