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살부터 PTSD,ADHD,조울증』1부 PTSD 트라우마5편
그날은 이상하게 평화로운 하루였습니다. 중학교 1학년이었던 저는 독서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선생님께 조용히 칭찬을 들었던 날. 기분이 괜찮았고, 마음도 조금은 편안했습니다. 그날만큼은 제가 무너지는 가족의 일부라는 생각을 잠시 잊을 수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형은 제가 초등학교 고학년일 무렵, 고등학교에 입학하며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 무렵부터 형은 저의 일상에서 점점 멀어졌고, 저 역시 형을 점점 낯선 사람처럼 느끼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 형이 집에 다시 돌아왔지만, 그땐 제가 밖에서 친구들과 노느라 바빴고, 다음 해 형은 재수를 시작했고 저는 중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서로 같은 집에 있었지만, 각자의 삶에 바빴고, 어쩌면 의도하지 않아도 서로를 모른 채 지냈습니다. 형은 제 삶의 바깥에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그날 형이 베란다에 앉아 있던 모습은, 낯설고 무서웠고, 동시에 충격이었습니다. 마치 배경으로만 존재하던 사람이 갑자기 제 앞에서 무너지는 걸 목격한 것 같았습니다. 그건 제 삶에 갑작스레 들이닥친 현실이었고, 그만큼 더 선명하게 박혔습니다.
그날은 금요일이었습니다. 집 앞에 도착했을 때부터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문을 열었을 때, 저는 그 방의 공기를 지금도 기억합니다. 형이 있던 그 방, 지금은 제가 쓰고 있는 그 방. 형은 라면을 큰 그릇에 담아놓았고, 옆에는 소주병이 세 개 놓여 있었습니다. 컴퓨터는 켜져 있었고, 화면엔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형은 베란다 난간에 위험하게 서있었습니다.
그 공기는 잊을 수 없습니다. 술과 라면 냄새, 컴퓨터에서 흘러나오는 정지된 빛, 그리고 형의 몸에서 느껴지던 어떤 낯선 정적. 형은 웃지도 않았고, 울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해탈한 사람처럼,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서 있었습니다.
너희들이 뭔데에?!
정확히는, 아파트 복도 쪽 난간에 걸터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며 누군가와 소리를 주고받고 있었습니다. 형은 아파트 중앙 놀이터에 있는 아이들과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아이들은 그걸 장난처럼 받아치며 따라 소리쳤습니다.
형은 그 순간, 감정의 제어가 완전히 풀려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 눈빛은 가까이에 있는 저에게조차 닿지 않았고, 마치 형이 어딘가 아주 멀리 가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모습은 해탈에 가까웠습니다. 무언가를 포기한 사람의 공기, 무너질 것도, 잃을 것도 남지 않은 얼굴. 저는 그때 처음으로 사람이 평온한 얼굴로 무너질 수도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형은 그 순간, 저와 같은 세계에 없는 사람 같았습니다.
그날 이전에도 형은 이상했습니다. 혼자 술을 마시고 돌아와, 제 방에 들어온 적이 있었습니다. 불을 끄고, 말없이 침대에 앉으라고 하더니 갑자기 말했습니다.
나는 너를 위해 사는 거야.
눈은 풀려 있었고, 말투는 흐느적거렸습니다. 그 말이 무서웠습니다. 이상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나를 위해서 해준 게... 요 근래에는 없는데 왜 저러지?’
그날은 아무도 집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 무서웠습니다. 그 말은 위로처럼 들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가 무언가를 대신 짊어져야 한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부채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날의 형은 그 감정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보였습니다. 아마 형도 알았을 것입니다. 자기에게 입시비로 1억이 들었다는 것을. 엄마가 끊임없이 말했던 그 숫자. 그 안에서 공부는 하기 싫고, 압박은 커지고, 무력감은 커졌을 것입니다. 형도 무너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단지, 그 무너짐의 방식이 저와 달랐을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형이 난간에 매달래 소리 지르던 그날, 옆집 아저씨가 결국 경찰에 전화를 했습니다. 결국 옆집 아저씨가 신고를 했는지, 경찰 네 분이 도착했습니다. 저는 그때 독서수업 때 사용했던 교재를 손에 꼭 쥔 채 집 안을 이리저리 서성였습니다. 경찰 아저씨 한 분이 저에게 조용히 말했습니다.
꼬마야. 이제 괜찮을 거야.
그 말이 진심인지, 위로였는지, 그냥 말이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제가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는 걸 더 선명히 깨달았습니다.
저는 그날 이후, 기분이 좋아지는 일이 두려워졌습니다. 잠시 마음이 편해지는 순간 뒤엔 언제나 위기가 따라왔기 때문입니다. 형도 그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무너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옆에서, 무너지는 사람을 지켜보는 법을 먼저 배워야 했습니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무너졌고, 서로에게 위로가 되지 못한 채 침묵과 공포만을 남겼습니다. 형은 결국, 감정의 해답을 찾지 못한 채 방 안으로 사라졌고, 저는 여전히 그날의 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저는 그 글을 다시 꺼내어 씁니다. 그때의 저를 위로하고, 형의 눈빛을 기억하고, 더는 그 밤을 혼자 떠안지 않기 위해서.
이 글은 『5살부터 PTSD,ADHD,조울증』 시리즈 <1부 PTSD 편>의 5편입니다.
아직 회복 중인 마음으로, 17년간의 흔적을 조심스럽게 꺼내고 있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