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의 정수기와 볶음수의 기억

『5살부터 PTSD,ADHD,조울증』1부 PTSD,트라우마 편 7편

by 조영철


2011년의 어느 날, 형이 장난스럽게 저를 불렀습니다. 그때 저는 초등학교 1학년, 형은 초등학교 6학년이었습니다. 형은 정수기 앞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고, 그 앞에 서 있던 저에게 신비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이 정수기는 지금 마법에 걸려 있어."


정수기에는 노란색 스티커가 하나 붙어 있었고, 그 위에는 검은색 영어 단어가 적혀 있었습니다. 형은 그걸 가리키며 마치 진짜 마법이라도 부린 듯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믿었고, 두 눈을 반짝이며 감탄했죠. 그 눈빛 속에는 놀라움과 기대, 그리고 어린아이 특유의 맑은 믿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형은 잔뜩 진지한 얼굴로 컵을 꺼내 들더니, 정수기에서 정수를 조금, 냉수를 조금 따라 섞었습니다. 그리고는 한참 고민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수를 조금, 냉수를 조금, 이렇게 섞으면 볶음수가 돼. 이건 마법의 물이야."


볶음수. 말도 안 되는 이름이었지만, 그 이름이 주는 유치한 따뜻함이 좋았습니다. 형은 정말 진지한 얼굴로 물을 건넸고, 저는 그 물이 진짜 특별하다고 믿으며 조심스럽게 마셨습니다. 입에 닿은 물은 그냥 평범한 미지근한 물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신기한 물처럼 느껴졌습니다. 형은 웃으며 말했습니다.


"이걸 마시면 너의 몸에 마법이 깃드는 거야."


저는 혼란스러우면서도 이상하게 기뻤습니다. 혼란은 금세 사라졌고, 남은 건 마법의 힘이 내 몸에 들어왔다는 환상적인 감정이었습니다. 그날의 장난은 너무 짧고 사소했지만, 그 기억은 아직도 제 마음속에 따뜻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 시절, 우리 집은 늘 조용했지만 그 조용함은 편안한 정적이 아니었습니다. 텔레비전 소리도, 웃음소리도 드물었고, 식탁에 앉아도 대화보다는 눈치가 먼저 오갔습니다. 엄마는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피곤에 절어 말없이 잠들었고, 형은 묵묵히 제 곁을 지켜주었습니다. 아이였던 저는 그 공기가 무겁다는 걸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지만, 어딘가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은 분명히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형은 가끔씩, 정말 가끔씩 저를 웃게 해 주었습니다.


어떤 날은 형이 오므라이스를 만들어주었고, 어떤 날은 이렇게 마법을 걸어주었습니다. 그때의 형은 어쩌면 그 나이로선 해줄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장난이었지만, 그 속에는 저를 웃게 하려는 진심이 담겨 있었던 것 같아요.


그 기억은 시간이 지나도 색이 바래지 않았습니다. 마치 오래된 필름 사진처럼, 조금은 흐릿해졌지만 오히려 그 흐릿함 속에서 따뜻함이 묻어납니다. 형은 장난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그 장난은 늘 저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볶음수라는 기발한 이름 하나에도, 형이 저를 얼마나 아끼고 있었는지가 느껴졌습니다.


가끔은 그 볶음수보다 더 이상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때 형이 만들어준 작은 마법은 아직도 제 안 어딘가에서 반짝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삶이 버거울 때, 무거운 하루 끝에서 문득 그 볶음수가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저는, 그때 형이 만들어준 그 웃음을 기억하며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 마법이 진짜였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그 마법이 제게는 잠시나마 집이라는 공간에서 웃을 수 있는 이유였고, 마음의 숨구멍이 되어주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기억 하나가 지금의 저를 구성하는 조각 중 하나로 남아 있다는 것이, 참 고맙습니다.




이 글은 『5살부터 PTSD,ADHD,조울증』 시리즈 <1부, 트라우마 편>의 7편입니다.

아직 회복 중인 마음으로, 17년간의 흔적을 조심스럽게 꺼내고 있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