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보령에 있는 성주사지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는 신라 하대, 구체적으로는 진성여왕 4년 차이던 890년 무염 스님(801~888)을 공적을 기록한 탑비다. 불교사회에서는 승려를 조형적으로 기념하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승탑을 세워 승려의 넋과 불공을 기리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탑비를 세워 승려의 생전 공적을 기록하는 방법이다. '비(석)'이라는 개념 자체가 특정 무언가의 내역을 작성하는 기록의 한 유형이었다.
무염은 신라 왕족 출신으로 신라 하대 당대의 여느 승려처럼 당나라에서 20여 년 간 유학 후 귀국해서 지금의 충남 보령시에 성주사를 건설하였다. 무염스님이 건설한 성주사는 교단이 더욱 확대되어 신라 하대 불교 선종을 주도하던 전국의 9가지 사찰들, 즉 구산선문들 중 성주산문을 형성했다. 비록 불교 선종은 신라 주류사회에서 배척당하고 6두품이나 호족과 같은 아웃사이더를 위한 공간이었으나 신라 하대의 여러 왕들이 무염 스님을 스승으로 모셨다고 한다. 당시 그의 별명은 '동방의 대보살'이었다. 888년 무염스님 타계 이후 당시 국왕이었던 진성여왕은 무염스님에게 '낭혜'라는 시호를 하사했고, 그의 제자들이 무염스님의 탑비를 세우자 해당 탑비에 '백월보광'이라는 탑호를 내렸다. 이때 '화상'이란 승려들 중에서도 대스승으로서 제자 승려들을 인도하는 승려를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국보 8호의 명칭은 '낭혜화상 백월보광 탑비'로 분절해서 읽으면 된다. 탑비의 내용은 신라 하대 지식인들 중 원 탑 오브 원 탑이었던 최치원이 지었다.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는 총높이 4.55m로 신라 시대 탑비들 중 가장 크다. 크기가 가장 크다고 전부 훌륭한 것은 아니나 그럼에도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는 그 자체로 주는 근엄함이 있다. 근엄함은 그 두꺼움에서 기인한다. 거북받침돌도 옆으로 넓직한 편이며 지붕돌도 상당히 두꺼운 편으로 국보 7호였던 봉경홍선사 갈기비와 마찬가지로 운룡이 휘어감고 있어 격동적이고 환상적인 구조를 연출해냈다. 무엇보다 비문이 적혀 있는 비석의 몸통 부분이 검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어서 훼손의 흔적도 적고 화강석 받침돌-지붕돌과 묘한 조화도 이루고 있다.
무염스님은 불도의 본성은 말이나 글에 있지 않고 진심에 있다고 보았다. 말과 이론은 불도를 전파하기 위한 가장 낮은 수단이고, 이심전심을 통해 불교의 도에 이를 수 있다고 설파했다. 굳이 불교의 도가 아니더라도 현대사회의 우리는 말과 글과 같은 수단에만 지나치게 의존하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많다. 중요한 건 마음이고 진심이다. 말과 글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진심이 결여된 말과 글은 공허할 뿐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