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의 흥법사지는 거돈사지와 법천사지와 더불어 원주의 3대 폐사지로 꼽히고 있다. 거돈사지와 법천사지가 붙어있고 흥법사지는 멀리 떨어져 있는 바람에 사람들이 앞의 두 폐사지만 찾는 경향이 있지만 흥법사지 역시 한때 내력이 깊은 고찰이었다. 흥법사는 신라 하대에 세원진 선종 계열의 사찰이었고 고려 초에 교세가 확장되었는데 승려 염거는 흥법사가 창건되던 초기에 부임했던 듯하다. 따라서 염거화상은 하대신라의 초창기 당시 인물로 사망한 시점도 하대신라가 중반기로 들어오기 직전이다. 굳이 염거화상의 생몰시점을 짚고 넘어가는 이유는 염거화상을 기리는 승탑이 그렇다면 하대신라 예술의 시작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염거화상승탑은 팔각원당형 승탑을 하고 있는데 일반적인 승탑의 모형이다. 즉 팔각원당 양식의 승탑이 염거화상탑에 의해 포문이 열렸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참고로 염거화상의 제자 중 한 명이 신라 하대에 개창되었던 구산선문 중 하나를 담당했다.
그런데 이 염거화상탑은 출생의 비밀을 안고 있다. 일제강점기 한 일본인이 염거화상탑을 밀반출하려다가 적발되어 총독부에 의해 경성으로 회수된다. 이후 계속 서울에 있다가 국립중앙박물관이 문을 열면서 염거화상탑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 중인데, 처음 일본도굴꾼이 염거화상탑을 훔치려고 했을 때 그 위치는 원주 흥법사지였다고 한다. 도굴꾼의 도굴로 이 승탑의 존재가 총독부에게 알려지자 총독부들은 전문가들을 흥법사지로 보내 승탑의 잃어버린 부분을 찾으라고 했다. 그런데 출토 결과 염거화상탑이 흥법사지에 있던 승탑이 아니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렇다고 원래 있던 자리도 알 길이 없으나 처음부터 흥법사지에 있던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그 출처를 알 수 없는 일은 비통하나 염거화상탑이 하대신라 승탑의 출발점이기 때문에 이 승탑을 한 번 보고 안 보고는 답사를 할 때 안목의 깊이가 다르다. 모든 미술양식이 그렇듯 그 양식을 태동시킨 1세대 작품들을 가장 먼저 봐야 하는 법이다. 염거화상탑의 원형 연꽃 기단부, 팔각탑신에 새겨진 부조들, 그리고 넓직하게 퍼진 지붕돌의 구조를 차근차근 뜯어보면 여행의 기본은 해내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