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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 May 13. 2020

[국보 107호] 백자 철화포도문 항아리

여백이란 무엇인가. 여백은 아무것도 없음이 아니다. 여백은 '무(無)'와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오히려 여백은 '공(空)'에 가깝다. 아무것도 없는 백짓장에선 여백이 탄생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없는 넓은 백지 위에 만약 한 그루의 나무가 그려져 있다면 그 순간 여백이 생긴다. 말하자면 여백은 '무언가 있음으로 해서 생기는 없음'이다. '있음'이 존재하지 않으면 여백도 없다. 여백은 감상자에게 상상의 몫을 확장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어떠한 예술이 입을 다문 채 굳이 장황한 말을 하지 않고 그 본질에 대한 판단을 감상자의 상상력에 맡기는 것이다. 여백은 철학의 영역이고, 관조의 세계이고, 사유의 공간이다. 그리고 그러한 활동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의 존재에서 비롯되는 법이다.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에 소장 중인 국보 107호 '백자 철화포도문 항아리'에서 비로소 그 여백의 진정한 형이상학적 가치를 느낄 수 있다. 여백의 역할에 대해선 국보 107호인 '백자 철화포도문 항아리'와 국보 93호인 '백자 철화포도원숭이문 항아리'를 비교해보면 단번에 파악이 가능하다. 국보 93호 '백자철화포도원숭이문 항아리'는 항아리의 절반 이상에 무늬가 새겨져 있다. 하단부에 작게 여백이 있긴 하지만 여백이라고 부르기에 무색할 정도로 여백의 기능을 한다고 할 수 없다. 이 항아리를 보고 여백의 미를 논할 순 없을 것이다. 반면 '백자 철화포도문 항아리'는 어떠한가. 높이 53cm인 국보 107호 항아리는 국보 93호에 비해 높이도 20cm가량 더 높다. 이 정도 크기의 비율에 똑같이 산화된 철로 그림을 그린 철화백자이고 소재 또한 똑같은 포도문인데 그림이 차지하는 비율을 보자면 국보 107호는 그래봤자 전체 항아리의 3분의 1가량밖에 차지하지 않고 있다. 이로써 나머지 3분의 2라는 여백이 생긴다. 이 포도문 철화로 인해 감상자는 여백의 세계에 잠입하게 된다.


포도문 철화의 회화성도 가히 걸작 중의 걸작이다. 자유로운 농담의 조절과 사실적인 필치는 18세기 조선의 백자와 회화 수준이 어디까지였는지 짐작하게 한다. 나는 이 항아리 하나 때문에라도 종종 이화여대박물관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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