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112호 감은사지 3층 동서석탑은 이제는 경주의 신라 문화유산을 대표하는 하나의 탑으로 자리매김한 듯하다. 통일신라의 석탑 양식은 거의 대부분 3층으로 통일되어 있는데 그 시작을 알린 작품이 감은사지3층석탑이다. 신라의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직후 왜구들이 쳐들어오자 이들을 물리치고 호국의 의미로 절을 세웠으나 완성된 모습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대신에 그의 아들이었던 신문왕이 절 공사를 마무리하고 나라를 지켜주신 아버지 문무왕의 은혜에 감사하겠다는 의미에서 절의 이름을 '감은사'라고 지었고, 감은사지3층석탑의 이름도 이렇게 만들어졌다.
감은사지 3층석탑은 석탑사 연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좌표를 찍고 있다. 원래 고구려, 백제, 신라가 처음 불교를 수용했을 때 석탑은 목탑이었다. 그러던 중 백제에서 처음으로 석탑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화강암 지대인 한국의 지리적 특성상 오히려 석탑이 더 적합했다. 문제는 백제에서 처음 제작된 석탑이 백제 말기였던 무왕 대였는데 이내 백제가 멸망해버리면서 석탑의 계보가 중단되는가 싶었다. 그러나 백제를 통합한 신라는 백제의 미륵사지 석탑과 정림사지5층 석탑을 보고 이를 적극 계승한 통일신라만의 석탑을 만들기 시작하니, 그 첫 총성을 울린 작품이 감은사지3층 석탑이다. 처음에는 신라도 5층 석탑을 제작하다가 감은사지 3층석탑을 기점으로 3층으로 층수를 축소시켰다. 이는 여리여리하고 고상한 멋을 버리고 육중하고 안정적이며 장대기골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함이었고, 유홍준 교수는 통일 직후 안정적인 새 국가 건설이라는 이념하에서 탄생했다고 설명한다.
감은사지 3층석탑을 보면 기단부를 아주 두껍게 둠으로써 안정적인 기반을 쌓고 1층까지도 후덕하게 처리하였다. 2층부터 3층까지 탑신의 비율과 체감률을 급격하게 줄여나가며 상승감을 꾀했다. 상륜부의 이 꼬챙이까지 둔 것을 보면 신문왕과 당대 신라석공들이 기단부와 1층의 둔한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치솟는 상승감에 얼마나 골두했을지 짐작이 간다.
그 기세는 결코 허세를 부리는 과장된 상승이 아니다. 대지에 굳건히 뿌리내린 팽창된 힘에 유지되어 있어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엄정한 기품이 서려 있다. 감은사 삼층석탑 앞에 서면 나는 저 장중한 위세 앞에 주눅이 들어 오금에 힘을 쓸 수가 없다.
-유홍준
감은사지3층석탑으로부터 시작한 3층 석탑 양식은 국보 37호인 황복사지 3층 석탑, 국보 38호인 고선사지 3층 석탑으로 이어지다가 9세기 마침내 불국사3층석탑, 이른바 석가탑으로 완성되기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