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회화는 총 15점이고 그 중 4점이 초상화다. 4개 중 2개는 고려시대 초상화 다른 2개는 조선 후기 송시열과 윤두서의 초상화다. 조선시대 초상화야 많이 남아 있지만 고려시대 초상화는 비교적 적은 편이다. 고려시대 초상화 두 점이 각각 국보 110호와 111호에 지정되어있으니 하나는 이제현의 초상이고 나머지는 안향의 초상이다. 그리고 안향의 초상이 이제현 초상보다 제작연대가 1년 정도 빠르니 4점의 국보초상화 중 가장 오래된 초상화이다. 제작연대도 안향의 초상이 더 빠르고 안향이 이제현의 스승인 점을 감안했을 때 안향의 초상이 111호에 지정된 건 살짝 아이러니컬하다.
안향은 한국철학사에 있어서, 아닌 한국사를 통틀어서 전환점의 계기를 마련했다. 조선의 건국이념이었던 성리학. 이 성리학이 고려 말 안향에 의해 처음 도입되었다. 그래서 안향을 한국 최초의 성리학자라고도 한다. 경상북도 영주의 토착호족 가문에서 태어난 안향을 원 간섭기에 관직생활을 하며 원나라에 유학할 일이 있었는데 그때 직접 주자가 정리한 성리학 저서들을 직접 손으로 베끼고 그 책을 1290년 고려로 가지고 들어왔다. 따라서 1290년은 한국철학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연도이다. 정치원로가 되어서도 원나라로 파견되는 사신단을 통해 유학자들의 화상, 성리학 저서들을 대량으로 구해오게 했으며 국가의 유학교육에도 힘썼다. 아울러 장학재단인 섬학전을 만든 장본인도 안향이었다. 안향이 아니었으면 조선 건국도 힘들었을 것이다. 최소한 지연됐을 것이다. 안향이 있었기에 신진사대부가 나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조선 사회에선 국가가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정파와 파벌을 가리지 않고 안향을 서원과 향교에서 모시며 제사를 지내주었다. 조선 중기 한 성리학자는 안향을 위한 서당을 세우고 이것을 사립학교로 확장하니 바로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 서원이었다. 경기도 의왕시에는 안향의 제실인 '안자묘'가 조성되어 있다.
안향 사후 12년 뒤였던 1318년 충숙왕은 안향의 초상을 그릴 것을 명령했고 이렇게 완성된 안향의 초상은 그의 고향이었던 영주 향교에서 보관하다가 조선 중기 주세붕이 향교를 안향의 사당 겸 서원으로 확장시키면서 백운동 서원에서 직접 안향 초상을 관리하게 되었다. 이제현 초상과 동일하게 좌측을 바라보고 오른쪽 볼을 보여주는 우안 형식이되 이제현 초상과는 달리 전신상이 아니라 반신상이다. 옷주름은 단순한 필치로 묘사하고 별다른 색채효과는 없으나 전체적인 윤곽선만은 뚜렷하여 품위가 있으면서도 고아하다. 상단부의 제문은 안향의 아들이 직접 쓴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