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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 May 16. 2020

[국보 110호] 이제현 초상

고려 말 유학자였던 익재 이제현은 한국사 성리학 연구자의 1세대로 그의 제자들이 대를 이어 신진사대부가 되고 이들이 조선을 건국하기 때문에 이제현은 조선시대에도 널리 공경을 받던 대학자 겸 정치인이었다. 이제현의 스승이 바로 한반도에 처음으로 성리학을 도입시켰던 안향이다. 왕위에서 물러나 원나라에서 강제 생활을 하던 충선왕은 재위 시절 친분이 있었던 이제현을 불러 시종케 하였다. 이제현은 충선왕을 시종하면서도 원나라 수도 연경(베이징)에서 만권당이라는 학원에서 유학을 수학한다. 만권당은 당시 중국 최대규모의 학원으로 원나라 학자들, 중국 한인 학자들, 그리고 고려를 비롯한 국제학자들까지 모두 모여 성리학을 연구하던 일종의 싱크탱크 겸 연구소였다. 이렇게 이제현은 충선왕과의 개인적 관계로 여러 번 원나라를 방문했고 1319년엔 충선왕과 함께 중국을 여행하다가 충선왕은 원나라 화가 진감여를 불러 이제현의 초상을 그리게 했다. 귀국할 때 이제현은 미처 이 초상화를 가지고 오지 못하는데 한참 뒤이제현이 고려의 재상이 되고 외교차 원나라를 방문했는데 이때 우연히 자신의 초상화를 발견하고는 귀국할 때 가지고 오게 된다. 바로 이 이제현의 초상이 오늘날 국보 110호이다.



이제현의 초상은 의자에 앉아 있는 모델의 전신상이며 조선시대에 초상화 달리 오른쪽 얼굴을 볼 수 있는 우안형식을 취하고 있다. 채색된 의자와 높은 탁상 위 서책들과 향로를 배치해 화폭구성을 다채롭게 꾸며주고 있다. 손은 안보이게 서로 포개놓고 옷 안 속에 숨겨두고 있는데 이를 '공수자세'라고 한다. 그런데 잘 보면 엄지손가락 하나가 튀어나와 있다. 이는 중국식 초상화의 특징이라고 한다.


화폭 상단 좌측에는 처음 초상화를 그렸을 당시 곁에 있던 탕병룡이 지어준 찬시가 있는데 내용은 이렇다. "옛날에 남겨둔 나의 초상은 양쪽 귀밑머리 푸르렀다오. 얼마나 많은 세월 흘러갔던가. 다시금 만나보니 정신은 아직 그대로 이 물건 다른 물건 아니라 전신이 곧바로 후신이로세. 아이들은 도무지 알아보지 못하고 서로가 누구냐고 질문을 하네." 화폭 상단 우측에는 이제현이 직접 지은 시가 있는데 이는 한참 뒤 이 초상화를 우연히 발견한 직후 반가운 마음에 적었다고 한다. "연우 기미년에 나는 나이 33세로 절강지방에 향을 내리러 가는 충선왕을 시종하였다. 왕은 고향 진감여를 불러 보잘 것 없는 나의 얼굴을 그리게 했으며, 탕병룡은 찬을 지었다. 연경으로 돌아와 초상화를 남한테 빌려주었다가 그 소재를 모르게 되었다. 그 후 31년이 지난 뒤 국서를 받들고 연경에 갔다가 다시 이 초상화를 보게 되었다. 노장의 달라진 얼굴에 놀라고, 이합에도 때가 있음을 느겼다. 그래서 한?운으로 하여금 붓을 잡게 하고 40자의 시를 구점하여 기록한다." 사진도 무엇도 없던 시절 30년 전 자신의 모습을 본 그 반가움은 실로 남달랐을 것이다. 현재 이제현의 초상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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