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와 관련된 도시를 떠올려 보면 흔히들 부여와 공주, 더 치자면 서울을 든다. 서울-공주-부여는 백제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비록 백제의 수도까지는 아니었지만 백제의 유적지가 짙게 남아있는 도시가 한 군데 더 있다. 바로 전북 익산이다. 서동요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백제 30대 왕 무왕은 당시의 수도 사비성(지금의 부여)에 기반을 둔 귀족세력의 힘을 해체하기 위해 익산으로 천도할 계획이었다. 무왕은 익산에 왕궁, 백제 최대규모의 절, 왕실 정원 등을 만들고 천도를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나갔다. 비록 정치적 이유로 천도가 이루어지진 않았으나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기 위한 인프라는 그대로 남아 있게 되었고, 이때 만들어졌던 사찰이 미륵사였다.
미륵사는 무왕이 왕권을 드높일 목적으로 천도까지 고려했기 때문에 아주 작정하고 만든 사찰이었다. 즉 그 규모가 남달랐으며 현재 미륵사는 남아있지 않지만 그 터는 백제 가람배치 양식의 전형으로 여겨지고 있다. 실제 백제의 큰 영향을 받은 일본의 가람배치 양식은 미륵사나 정림사 배치양식과 거의 동일하다시피 하다. 가람배치양식은 여러 가지 요인들로 규정될 수 있지만 그 중 하나는 탑의 배치양식이다. 익산 미륵사의 탑 배치양식, 즉 백제의 가람배치양식이란 가운데 거대한 목탑을 세우고 좌우로 석탑을 세우는 방식을 말한다. 좌우에 있는 석탑을 동탑과 서탑으로 부른다. 삼국은 불교를 공인할 초창기에는 석탑보다는 목탑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다 점차 목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갔는데 백제의 경우 그 과도기에 있는 사례가 익산 미륵사다. 가운데 목탑, 좌우로 석탑이 2개가 있으나 석탑의 경우 재질만 돌일 뿐 생김새는 꼭 목탑이다.
그러나 백제를 상징하는 석탑이 미륵사 석탑이 아닌 정림사 5층 석탑이 된 것은 미륵사 석탑은 끔찍한 일을 겪어 그 완전한 형태를 이제 더 이상 기대해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정림사지 5층 석탑이 미륵사 석탑에 비해 떨어진다는 뜻은 아니다.) 나무로 만들어진 절 자체나 목탑이야 쉽게 불타 없어지기 때문에 그럴려니 하겠다. 한국의 사찰 대부분이 그렇듯 절과 목탑은 훼손될 지언정 석탑은 남아 있다. 석탑은 불에 타지 않고 세월의 마모에도 나름 무딘 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익산 미륵사에 가서 볼 수 있는 석탑은 끔찍한 몰골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당시 본격적인 한국 문화재 조사 사업이 시작됐을 때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동탑은 완전히 허물어져 있고 서탑만 남아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러다 총독부에 서탑마저 절반이 무너져 내렸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총독부는 문화재전담원이었던 세키노 타다시를 보내 사태를 해결하려 했다. 그런데 세키노 타다시는 문화재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없던 것이었을까 아니면 한국에 대한 예우가 없었던 것이었을까.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석탑에 무너지지 않게 하겠다는 명목으로 시멘트를 부어버렸다. 이 때문에 미륵사 석탑 서탑은 아주 흉측한 모습을 갖게 되었다. 시멘트는 무려 18년이라는 작업 결과 겨우 떼어내었다.
미륵사 석탑의 수모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93년 노태우 정부는 미륵사 동탑 복원 계획을 발표했고 철저한 고증이나 조사 없이 무리하게 성과만을 집착하다가 이상한 석탑이 복원되어버렸다. 고미술이 갖는 미학은 세월의 포섭이다. 물론 복원이라는 게 세월의 흔적까지 그대로 복원할 수 없지만 적어도 최대한 고풍적 느낌을 살리기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마냥 세련되어선 안 된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 때 복원된, 아니 복원되어버린 동탑은 고급 고층아파트 바닥에서나 볼 법한 흰 돌로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을 거 같은 로보트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동양예술의 가장 중요한 것은 주변과의 조화다. 감정 하나 표출하지 못할 거 같은 동탑은 옆에 있는 서탑이나 폐사지와 전혀 어울리지 못하고 있다. 최근 유행어로 말하자면 "갑자기..?" 이다.
근현대의 기술로 문화재 조사 사업에 들어갈 때 이미 미륵사 동서석탑은 완전한 형태가 아니라 몇 층이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으나 정교한 컴퓨터로 조사해본 결과 9층이 가장 유력하다고 한다. 그나마 온전히 보존되어 있는 석탑의 일부분을 봤을 때 기단부만 봐도 미륵사 석탑이 얼마나 거대했는가를 알 수 있으며, 온전히 있었을 당시의 석탑과 미륵사의 모든 요소들이 다 함께 공존하고 있었을 당시의 모습은 상상력에만 맡길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