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천 팔공산 언저리에 은해사라는 절이 있고, 은해사에서 4km 정도 떨어진 곳에 거조암이라는 암자가 있다. 본래 거조암은 신라 중대에 만들어졌던 어엿한 절이었으나 신라 말 헌덕왕 대에 인근에 은해사라는 절이 창건되면서 은해사의 부속암자가 되었다. 거조암 가운데 무심한 듯 놓여 있는 영산전이 국보 14호다. 국보라고 해서 꼭 대중의 이목과 화려한 조명만을 받는 것은 아니다. 영산전처럼 산 속 깊숙이에서 그 가치를 아는 사람들에게만 묵직하게 감동을 전해주는 국보들도 많다.
거조암은 신라 시대에 만들어졌고, 영산전은 고려 말이었던 1375년 우왕 즉위연도에 지어졌다. 고려 후기에는 주로 다포 양식에 장식적인 사찰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영산전만큼은 고려 후기임에도 여전히 고려 전기의 소박하고 정담한 양식을 고수하고 있다. 지붕은 맞배지붕이고 공포는 주심포 양식을 하고 있어서 불필요한 장식은 모조리 소거했다. 정면 7칸짜리 건물로 높이에 비해 옆으로 더 퍼져있는 앉음새를 통해 위압적이지 않고 포근한 느낌을 주고 있다. 무엇보다 건축의 색상이 안락한 느낌을 더 해주는데, 황색이라고 하기엔 옅고 아이보리라고 하기엔 짙은 영산전 특유의 색상은 마치 인간의 피부살색과 닮아 있어 더 정감이 간다.
사찰의 부속건물들은 건축 양식도 대단히 중요하지만 내실에 모시고 있는 불상 덕분에 강한 생명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거조암 영산전에는 석가모니불과 무려 526개의 석조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나한은 '아라한'의 준말로 수행을 끝내 도의 경지에 도달은 중생을 일컫는 말이다. 이런 나한들이 무려 526분이나 계시니 영산전은 소박하지만 상당한 불력을 가지고 있는 한국전통 건축의 자랑이라고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