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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 Jan 16. 2020

[국보 21호] 불국사 석가탑, 불국사 시리즈②

   다보탑과 함께 불국사를 대표하는 쌍두탑. 우리에겐 '석가탑'이라고 너무 잘 알려진 국보 21호의 정식 명칭은 불국사 3층 석탑이다. 우리가 '석가탑'이라고 하는 명칭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의 준말이다.  '석가여래'라는 현세의 부처가 설법을 전파해주는 탑이라는 뜻이다. 석가탑은 '그림자가 없다'는 뜻의 '무영탑'이라고도 불린다. '무영탑'이라는 명칭에는 흥미진진하지만 가슴 아픈 설화가 내려온다. 멸망한 백제 출신의 석공 아사달이 석가탑 건설 과정에 참여하게 되어 경주로 가게 되었는데 아사달의 아내 아사녀가 건설 현장을 찾아간다. 그러나 석가탑 작업이 전부 끝날 때까지 남편을 만날 수 없다는 통보를 받는다. 그렇다면 석가탑이 완공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언제 끝이 날 지 모르는 상황에서 아사달은 간접적으로 나마 '영지'라는 연못에 석가탑의 그림자가 비추는 것을 보고 공사가 끝났음을 알라는 말을 전했다. 아사녀는 공사가 끝날 때까지 하염없이 영지라는 연못에서 석가탑의 그림자가 드리우기를 기다렸는데, 아사달이 신라의 공주와 바람맞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영지라는 연못에 빠져 죽어버렸다. 아사달은 아사녀가 빠져 죽었다는 소식을 듣곤 몹시 후회하며 본인도 빠져 죽었다. 이후부터는 석가탑이 완성되어도 연못에 그림자가 비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영지'의 진위여부를 두고는 논란이 많다. 사실 진위여부가 중요하겠는가. 스토리텔링이 더 중요한 거지.



   각설하고 석가탑은 신라 8세기 경덕왕 시절 문화적으로 가장 찬란하던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다보탑과는 다르게 완성된 고전양식에 철저히 의거해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석가탑은 통일신라가 문화적으로 가장 강력했던 시기의 전형을 제시해주고 있는 셈이다. 한 마디로 모범생이라고나 할까. 기단부는 2단으로 되어 있어 상대적으로 기단부가 높은 편에 속하면서 안정적인 든든함을 주고 있다. 탑의 몸통에 해당하는 3층부는 완벽한 비례에 따라 체감되고 있어 구조적 완벽함이라 함은 역시 수리적 계산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명제를 입증해준다. 상륜부 또한 다른 탑들에 비해 비교적 높은 편에 속한다. 하늘을 찌를 듯 뾰족한 상륜부는 석탑의 높은 상승감을 주면서 종교적  여유를 부리는 듯하다. 거드름을 피우지 않는 모범생 석가탑은 이상적인 석탑의 답안을 제시한다. 기단부와 탑의 몸통 하단부는 건장함을 나타내는 동시에 탑이 지나치게 육중해보이지 않도록 체감률과 상륜부의 치솟는 높이로 가벼운 필치를 만들어내 전체적으로 시원하면서도 믿음직한 석탑을 자아내는 것이다. 



    석가탑만의 개성을 그래도 꼽아보자면 각 층 기단마다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조각해넣어 마치 건축물을 형상화했다는 점이다. 다보탑도 마찬가지로 건축물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석가탑과 다보탑은 평범한 석탑 그 이상의 존재의미를 부여하려 했던 의도가 담기지 않았나 싶다. 그런 점에서 불국사는 신라 정부가 아주 작정을 하고 모든 실력을 쏟아부었던 것이다. 천재가 자기 재능을 100% 다 쏟아부었을 때 어떤 어마어마한 작품이 나오는지 불국사는 섬뜩할 정도로 보여준다. 



   석가탑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나오는 이야기를 할 차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전화위복인지 우연상견인지 평가 내리기 애매한 사건이 있었다. 1966년 9월 석가탑을 도굴하려다가 실패한 도굴범들이 검거되었다. 이 도굴범들은 전문 도굴꾼들로 석가탑은 물론 10개월 간 전국의 유명하다는 사찰을 돌아다니며 탑을 훼손하고 그 속에 있는 사리함이나 장엄구들을 훔치고 다녔다고 한다. 원래 불탑을 만들 때는 그 속에 보물을 보관해두는 것이 관례다. 이는 모두가 다 알고 있지만 탑 속 보물이 궁금하다는 이유로 무턱대로 탑을 해체할 수는 없다. 그래서 궁금하더라도 문화재의 훼손을 방지하고자 굳이 탑을 해체시키지 않는다. 그런데 이 도굴꾼들 때문에 석가탑이 훼손되자 이미 훼손된 거 복원하는 작업을 거치면서 탑 속에 있을 사리함을 꺼내자는 의견이 나왔고 석가탑 속에서는 세계적으로도 아름다움을 극찬받고 있는 석가탑 사리장치가 출토되었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출토되기도 했다. 석가탑 사리장치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출토로 세계미술계와 세계학계의 온 시선이 한국으로 쏠렸고 당시 신라인들의 예술성과 문화적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석가탑 사리장치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출토된 보물은 눈부신 발견이라고 할 수 있지만 발굴 후 석가탑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관리인들의 어처구니 없는 실수로 2층 옥개석과 3층 탑신이 파손되는 일도 있었다. 일단 공사 자체가 무리하게 진행되었고 복원도구들조차 다 녹슨 상태였다고 한다. 다행히 종국에는 복원을 무사히 마무리하여 지금의 우리가 석가탑을 관람할 수는 있으나 2층 옥개석은 영원히 복원되기 힘들다고 한다.



   석가탑은 그 자체로도 훌륭하지만 역시 석가탑은 다보탑과 함께 관람할 때 가장 뿌듯하다. 이 두 탑은 그 오랜 세월 옆에 있으면서 서로를 지켜봐주어 왔다. 친구, 애인, 가족으로도 표현될 수 없는 관계가 석가탑과 다보탑이다. 석가탑과 다보탑의 높이도 각각 10.75m와 10.29m로 거의 비슷하며 탑에 담긴 종교적 의미 역시 훈훈하다. 앞서 석가탑의 명칭은 현세의 부처 석가여래가 설법을 전파한다는 뜻이라고 했는데, 다보탑의 명칭은 석가여래 옆에서 그의 말이 맞다고 증명해주는 과거의 부처 다보불에서 기인하고 있다. 석가탑과 다보탑이 겪은 전성기도 전성기지만 험난했던 수모를 겪었던 세월을 함께 견뎌냈던 사이인 만큼  불국사를 가면 두 탑을 한 번에 담은 사진을 찍는 것이 그들의 우정과 사랑과 그 세월을 축복해주는 방식일 수도 있겠다.


사진출처: 문화유산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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