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시내에서 직행하는 버스 없이 불국사에서 타야 하는 버스, 불국사에서 도보로 40분 가량 걸리는 등산, 자차를 가져오더라도 상당히 험한 길을 가야만 하는 토함산 아랫자락의 석불사. 현재 '석불사'라는 사찰은 없고 석불사의 '석불'만 그윽하게 남아 있는 석굴사원. 신라를 대표하던 얼굴이 시긴이 지나 한민족을 대표하는 얼굴이 된 석굴암은 아마 가장 압도적인 존재감을 지닌 문화재이자 보물이자 우리의 자산일 것이다. 1995년도 불국사와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된 석굴암은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이라는 첫번째 등재기준과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이라는 네 번째 등재기준에 따라 등재되었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기준에 의거해 석굴암의 가치를 정리해보자면 석굴암은 예술과 역사와 기술을 한 데 종합한 걸작인 것이다.
석불사의 석굴, 그것은 종교와 과학과 예술이 하나됨을 이루는 지고의 최미이다.
-미술평론가 유홍준
석굴암의 원래 명칭은 '석불사 본존상'이 맞으나 널리 알려진 대로 '석굴암'이란 명칭을 쓰겠다. 석불사와 석굴암은 신라 시대의 미술을 거론할 때마다 등장하는 신라 중대 8세기 경덕왕 대에 불국사와 같이 건설되었다. 건설총지휘자는 불국사를 진두지휘했던 김대문이었다. 불국사든 석굴암이든 각각 김대문과 얽힌 일화들이 있지만 두 거대한 건설은 왕권을 가시적으로 드높이고 강화하기 위한 경덕왕의 정치적 내막 속에서 예술성과 기술력이 완성도의 정점을 찍던 시기에 진행되었다.
인도에서 시작되어 중국을 거쳐 한반도로 들어온 석굴사원은 석굴암이 유일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대한민국에서 흔하지도 않다. 한국은 단단한 화강암 지대인지라 석굴을 만들기가 쉽지가 않다. 그래서 경덕왕과 김대문은 화강암을 파서 굴을 만들지 않고 인공으로 석굴을 지상에 만들자는 결론이 나왔다. 쉽게 말해 인도의 아잔타 석굴사원이나 중국의 둔황, 룽먼, 윈강 석굴사원은 산을 굴착해서 그 안에 본존불을 모신 반면 한국의 석굴암은 산을 굴착하지 않고 인력으로 석굴 자체를 만들어버렸다.
석굴암은 전실-비도-원실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사각형의 전실에는 불교의 8수호신 팔부신중이 좌우 양면에 배치되어 있고 비도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악귀를 처단하는 또다른 불교의 수호신 금강역사 두 분이 지키고 있다. 석굴암 본존불을 들어가기 이전 사악한 속세의 마음은 이곳 전실에서 모두 차단된 채 경건한 마음으로 전실 안쪽으로 들어가게 된다. 전실과 원실을 이어주는 좁은 통로인 비도에는 사왕천의 주신인 네 명의 외호신 사천왕상들이 있다. 원래 비도에는 두 개의 탑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일제에 의해 도둑맞았다. 그리고 비도를 지나면 마침내 마주하는 원형 원실의 본존불. 그 뒤로는 부처의 10제자들이 본존불을 둘러싸고 있다. 석굴암의 미술적 완성도는 원실(주실)의 천장에서도 발견된다. 원실은 돔으로 설계되어 있는데 돔 건설은 내부 하중을 균형있게 맞춰야 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결코 쉬운 공법이 아니다. 원실의 돔 천장에는 삐죽삐죽 튀어나온 돌들이 있는데 전문용어로는 '동틀돌' 혹은 '리벳'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 삐침돌들은 돌의 하중으로 곳곳에서 버티게 해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 돔을 만들 때 쉽게 무너질 수 있는 현상을 김대문은 이 삐침돌들로 해결한 것이다. 신라인들의 석조기술도 기술이지만 삐침돌은 묘하게 천장의 단조로움을 극복해주기도 한다. 석굴암의 돔은 로마의 판테온과 견줄 수 있다고 생각하나 또 석굴암에 없는 뛰어남이 판테온에 있듯이 석굴암에도 판테온에는 없는 고유의 매력이 있다.
불국사의 도면을 수리적으로 분석한 일제강점기 당시의 요네다 미요지는 7년 간의 연구 끝에 석굴암과 본존불에 대한 수리적 분석을 발표한 바 있다. 이는 석굴암의 우수함을 수학적으로 그리고 공학적으로 해설한 최초의 사례였다. 원형 주실에 내접하게 정육각형을 그려보면 원실이 입구가 정육각형 한 변의 길이와 정확히 일치한다. 또한 전실의 한 면을 한 변으로 해서 정삼각형을 그리면 대각의 꼭지점에 해당하는 지점에 석굴암 본존불이 위치하고 있다. 이 외에도 석굴암에는 각종 수리적 비례를 응용하여 웬만한 수학자의 지식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만들어낼 수 없는, 한 치의 흠도 인정하지 않은 수학적 공식들이 대입되어 있다. 서울대 물리학과 남천우 교수는 아마 신라인들은 원주율 파이의 값을 3.14보다 더 정확하고 세밀하게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석굴의 구조란 깊이 조사하면 조사할수록 실로 무서우리만큼 숫자상의 조화로 충만되어 있다.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교수 남천우
석굴암 본존불에 대한 예찬을 시작해보자. 석굴암 본존불은 절대자로서의 권위와 기품을 드러내고자 의도적으로 인간의 기본적인 신체 비례에 비해 얼굴의 비율이 다소 크게 했다. 옷의 주름은 거의 최소화했고 어깨를 상당히 넓혀 다소 관능적이기까지 하며 엄격하고 근엄한 존재감은 특유의 여유로움마저 느껴진다. 석굴암 본존불은 아름답다기보다는 장엄하다. 인도의 간다라 미술양식 영향도 받았기 때문에 다소 서양적인 외모 역시 본존불의 범상치 않음을 강조시킨다. 그러니 석굴암 본존불을 보는 사람은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감에 압도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석굴암은 하나의 마음을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는 정연한 구성이다.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유기체적 제작이다. 외형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놀랄 만큼 주도면밀히 계획된 완전한 통일체다.
-야나기 무네요시
이 정도 미술사적 좌표에서 위상을 드러낸다면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1913년 1대 데라우치 총독은 석굴암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지시하였다. 이 보수공사 과정에서 석굴암의 습기를 해결해주던 샘물을 본 일본 인부들은 그 기능이 뭔지 모르고 샘물을 막아버렸다. 그리고 석굴암을 해체하고 재조립하는 과정에서 고대 신라인들도 해냈던 것을 할 줄 몰랐던 총독부 측에서는 그냥 시멘트를 부어버렸다. 결국 보수공사 이후 석굴암에는 누수현상이 심각할 정도로 일어났다고 한다. 당황한 총독부는 몇 차례 거액을 투자하여 누수현상을 해결할 공사를 재개했으나 번번이 별 소득을 내지 못했다. 샘물까지 막아버려서 석굴암 곳곳엔 이끼까지 끼기 시작했다. 결국 총독부는 이끼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석굴암 내부에 보일러를 설치해버렸다. 이는 일본인들이 석굴암을 의도적으로 훼손하려는 것보단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해 기술력을 동원한 것인데, 동원한 기술력이 얼마나 엉망이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문화재에 대해 일본인들은 말그대로 무식했던 것이다. 몇 천 년 전 신라인들이 해냈던 것을 산업화 이후 일본인들은 할 수 없었다. 그래놓고 데라우치 총독은 석상에서 "조선인들은 문화재를 보존할 줄 모르는 미개한 민족이다."라는 인터뷰를 했다고 한다.
해방 후 1960년대에 와서 미술사가, 과학자, 고고학자 전문가들이 총동원되어 샘물의 존재 기능에 대해 밝혀냈다. 온도와 습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김대성은 일부러 두 개의 샘물이 흐르는 기반 위에 석굴암을 건설한 것이었다. 신라인들도 생각해냈던 원리를 산업화 이후의 우리 후손들이 알기까지 왜 이렇게 긴 시간이 걸렸을까. 그리고 마침내 보일러, 샘물 배수관, 시멘트를 모두 제거해버렸다.
석굴암에 오르는 관광객들이 시원한 동해바다 전경을 보며 절대자에게 압도되었던 외경심을 어느 정도 내려놓을 수 있게 된다. 그런데 그 관광객의 시선이 바로 석굴암 본존불의 시선이다. 석굴암 본존불은 창건 이래 지금까지 해가 떠오르는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앞으로도 떠오르는 태양과 태양의 빛을 받을 것이다. 우리가 석굴암에 올라 석굴암의 시선과 하나가 되듯 석굴암은 우리의 민족이며 우리의 얼이고 우리의 얼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