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를 놀러가지 않더라도 경주 어디를 걸어도 고분들이 항상 즐비여 있는 이미지 정도는 알 것이다. 경주를 한 번 놀러가 본 사람이라면 대릉원 지구에 고분군이 가장 많이 모여 있다는 여행 정보 정도는 알 것이다. 고대 우리의 조상들은 사람이 사는 곳과 죽은 사람이 머무는 곳을 분리했기 때문에 고분군들은 주로 한 곳에 밀집해 있었고, 가장 많이 밀집되어 있던 곳이 지금의 대릉원 지구였다. 그러나 신라가 점차 커가는 과정에서 대릉원 지구만으로는 고분을 수용하기 부족하여 인근 서악동 자락에 새로운 고분 지구를 만들었고 이곳이 서악동 고분군이다. 아마 서악동 고분군에서 가장 유명한 왕릉은 태종무열왕일 것이다. 아무래도 왕릉의 인지도 역시 왕의 대중성에 따라 달라지니까. 태종무열왕릉은 주인을 알 수 있는 신라의 고분 8기 중 하나이다.
태종무열왕의 본명은 김춘추. 어쩌면 왕호보다 본명이 더 잘 알려진 드문 사례일 텐데,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당나라와 나당연합군을 맺고 비록 삼국통일의 완성을 보진 못했으나 삼국통일전쟁을 시작한 장본인이었다. 태종무열왕릉 옆쪽에는 무열왕의 공덕을 예찬하는 비석, 태종무열왕릉비가 덩그러니 놓여 있고 이것이 국보 25호이다. 그러나 이 국보 25호를 본 사람이라면 적잖이 당황할 것이다. 비석의 몸통이 없기 때문이다. 고려시대나 조선 중기까지는 있었으리라 추정이 되는데 언제 어떻게 훼손되거나 도둑맞았는지 알 수 없으며 이 때문에 비석의 내용조차 영원한 미스테리 속에 남아 있다. 다만 거북받침돌과 비석 지붕돌만 불완전하게 놓여 있지만 이것이라도 남아 있다는 게 참 다행이지 싶다.
남아있는 거북받침돌은 복원이 한 번도 된 적이 없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로 마치 얼마 전에 조각된 마냥 세련되고 깔끔하다. 거북의 등껍질 문양과 연꽃문, 구름문의 조각선들은 뚜렷하게 조각되어 있으며 거북의 머리는 하늘을 향해 높이 쳐들고 있어 넘치는 에너지와 동시에 삼국통일전쟁을 시작했던 무열왕을 진력을 상징하는 듯하다. 지붕돌에 있는 용들이 서로를 묶고 있는 격동침은 용솟음의 입체감을 지대하게 살린 사례라고도 할 수 있다. 지금은 전국 곳곳 사찰이나 사당, 무덤을 찾으면 이런 거북비들을 숱하게 많이 볼 수 있으나 중국에서 넘어온 이 거북돌 양식이 최초로 적용된 사례가 바로 이 태종무열왕릉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