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이차돈이 불교를 공인화하기 위해 당시 국왕이었던 법흥왕이 자신을 처형시키는 자작극을 펼쳤던 이차돈의 순교 사건은 대단히 유명한 일화다. 이때 이차돈의 목에서는 흰 피가 뿌려졌고 종교적 신성함을 눈으로 목격한 신라 귀족들은 더 이상 불교 공인에 반대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차돈의 목이 잘릴 때 날라갔다가 다시 떨어진 지점에 법흥왕은 이차돈을 기리고자 사찰을 세웠고, 이것이 경주에 있는 백률사다. 백률사에서는 이차돈의 순교 사건을 그림으로 조각한 비석이 출토되기도 해 사찰에 실린 전설의 신비로움을 생생하게 해주는 일도 있었다. 지금의 백률사는 그 당시 그대로의 백률사가 아니고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사찰을 다시 지은 것이다.
백률사 창건은 법흥왕이 불교를 신라의 국교로 공인했던 6세기였고 그로부터 몇 백년 후 8세기 경 국보 28호에 해당하는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이 제작되었다. 다시 말해 백률사 창건은 신라의 통일 이전, 금동약사여래입상 제작은 신라의 통일 이후 중대이다. 원래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은 백률사에 있었으나 안전한 보존을 위해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소장 중이다. 약사여래란 중생들의 건강을 책임지고 병을 치료해주는 부처로 무병장수를 원한다면 다른 부처상이 아니라 이 약사여래상을 찾아야 한다.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은 높이 1.77m로 사람 크기와 맞먹는다. 입상인지라 서 있기 때문에 더더욱 사람 크기와 비슷하다.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은 '금동'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금들이 전부 벗겨져 있다. 다만 옅게 보이는 도금으로 과거의 모습을 추측만 할 뿐이다. 또한 두 손까지 유실되어 완전한 형태는 아니다. 얼굴의 인상은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이나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과 거의 동일하다. 이유는 세 불상 모두 제작된 시기가 비슷하고 신라 중대의 전형적인 양식을 따랐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보 26호에서부터 28호에 이르는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상,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그리고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은 신라 중대의 조각양식을 보여주는 3대 불상으로 꼽히고 있다. 다만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의 경우 몸통의 형체가 다른 두 불상과 다소 다르다. 다만 서있고 앉아 있고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두 불상은 가슴과 어깨가 풍만하고 허리가 잘록하여 남성성을 강하게 돋보이고 있지만,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의 경우 복부가 풍만하게 나와 있다. 옷의 형태도 차이점이 드러나는데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의 옷 주름들이 모두 아래를 향하고 있어 조각상의 상체보다는 하체가 펑퍼짐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