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문화가 더 짙게 베어있는 현대의 우리들에게 사찰은 산속에 있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일지 몰라도 고대 삼국시대에 고구려, 백제, 신라가 처음 불교를 받아드렸을 당시에는 시내 한 중간에 사찰을 건립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고구려, 백제, 통일 이전 신라의 사찰 혹은 사찰터들을 보면 대부분이 평지이다. 신라는 527년 신라의 23대왕이었던 법흥왕 때 처음 불교를 공인한 이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까지 약 6~7명의 국왕들을 거치며 왕실 지원 하에 사찰들이 대거 건설되었고 당시 신라인들과 가까운 시내 곳곳에 자리잡았다. 신라가 불교를 공인한 초창기에 평지에 집중적으로 지어진 대규모 사찰들이 9개 정도가 있었는데 모두 이름에 '황'자가 들어갔다고 한다. 이 9개의 절들을 일컬어 '구황'이라고 불렀고 지금의 '경주시 구황동'이라는 지명은 이렇게 탄생했다. 이 9가지 '황'들 중 하나가 분황사였다. 분황사는 634년 신라의 27대왕이었던 선덕여왕 때 창건되었다. '황'이란 신라의 임금을 뜻하고 '분'이란 '향기롭다'는 뜻이니 '분황'은 '향기로운 임금'을 의미한다. 즉 선덕여왕을 가리키는 말이다.
분황사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 차례의 소실과 재건을 거쳤고 지금의 분황사가 신라 당시의 모습은 아니다만 국보 30호에 해당하는 분황사 모전 석탑은 비록 완전한 모습은 아닐지라도 여전히 남아 있다. 분황사 모전 석탑은 약 9층 정도로 추정하고 있으나 현재에는 기단부와 함께 3층까지밖에 남아 있지 않고 온전했을 당시에는 약 15m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15m면 아파트 5층 정도의 높이니 상당히 거대했다는 것이다. 분황사 모전 석탑은 얼핏 보면 벽돌로 쌓아올린 탑으로 보여 전탑으로 착각할 수 있으나 벽돌이 아닌 돌로 제작되었다. 그래서 전탑이 아닌 전탑을 닮은 '모전 석탑'인 것이다. 지금의 분황사 모전 석탑 상층에 지붕이 있어 3층으로 착각할 수 있으나 원래 지붕은 없었다가 1915년 일제강점기 때 해체 수리 작업을 하는 도중 지붕돌을 쌓아올린 것이라고 한다.
분황사 모전 석탑의 각 면에는 입구마다 탑을 지키는 역사들이 두 명씩 조각되어 있다. 이 백색의 조각상들은 전반적인 회색의 석탑 색상과 절묘한 배합을 이루고 있다. 탑의 모서리에는 화강암으로 조각된 사자상들이 2중으로 탑을 지켜주고 있다. 넓직한 규모에 힘있고 꽉 찬 느낌을 주는 분황사 모전 석탑이 온전하게 9층까지 남아있었더라면 경주의 스카이라인은 더욱 볼만 했을 것이다.
삼국 모두 처음 불교를 공인했을 당시에는 주로 목탑이었으나 점차 석탑으로 넘어갔다. 그 과도기를 입증해주는 사례가 백제의 미륵사지 석탑과 신라의 분황사 모전 석탑이다. 다만 전탑양식은 중국의 양식인 점을 미루어 보아 목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도중 중국식 전탑양식에 도전해본가 아닌가 한다. 물론 신라는 분황사 모전 석탑의 기술을 바탕으로 이후 안동에 법흥사지 칠층전탑(국보 16호 참고)을 만들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