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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 Feb 02. 2020

[국보 33호] 창녕 진흥왕 척경비, 가야 정복의 현장

    '순수(巡狩)'란 왕이 수도가 아닌 지방 곳곳을 순회하는 행사를 말하며, 순수한 곳들 중에서 기념적인 공간에 세운 비석을 순수비라고 한다. 순수는 단순히 왕실의 쇼맨십이라기보다는 새롭게 편입된 영토의 주민들에게 국왕이 직접 행차하여 민심을 다독이는 역할을 했다. 고구려에 광개토대왕이, 백제에 근초고왕이 있듯이 신라에는영토를 최대치로 넓히며 신라의 전성기를 구가한 6세기의 정복군주 진흥왕(신라 24대왕. 재위 540~576년)이 있었다. 따라서 진흥왕 순수비란 진흥왕이 직접 넓혀놓은 영토를 순수하며 이를 찬미하고 기념하는 순수비이며 현재까지 알려진 순수비는 총 4기이다. 그 중 하나는 국보 3호에 해당하는 북한산진흥왕순수비이며 두 번째는 국보 33호에 해당하는 창녕 진흥왕 척경비이다. 


    진흥왕의 영토확장 전쟁은 한강 점령에서부터 시작됐다. 진흥왕이 재위하기 훨씬 이전부터 신라는 백제와 동맹관계였는데 고구려가 백제의 국경을 공격해오자 백제의 요청에 따라 진흥왕은 군대를 파견하여 나제동맹은 고구려를 물리치고 되려 반격하여 서울까지 장악, 한강을 차지하였다. 애초 계획대로 한반도의 젖줄이었던 한강 유역을 백제와 신라가 반반씩 나눠가지기로 했으나 진흥왕은 약속을 파기한 채 백제를 급습하였고 한강 유역을 독차지하였다. 이 전투에서 백제의 성왕은 전사하였고 백제인들은 신라인들하면 이를 바득바득 갈게 되었다.



   백제와의 전쟁에서 큰 승과를 거둔 신라에게 다음 표적은 가야였다. 가야는 백제와 연합해 신라의 서남쪽에서 위협을 서슴치 않으며 시도 때도 없이 국경을 휘집어놓았다. 그러나 백제가 쇠잔해지자마자 가야는 신라 진흥왕에게 속절없이 무너졌다. 문화재청의 설명대로 가야는 신라에게 "신라가 서쪽으로 진출하는데 있어 마치 부채살의 꼭지와 같은 중요한 길목"이었다. 신라는 가야 연맹의 가맹국들을 하나하나 점령해갔고 진흥왕 재위 16년이 되던 555년 진흥왕은 지금의 창녕 땅에 근거지를 둔 비화가야를 무력으로 병합했다. 가야의 모든 연맹국들을 무너뜨리고 가야의 전 영토를 신라로 병합한 시점은 562년이다. 진흥왕이 창녕 척경비를 세운 연도는 561년이니 가야 멸망 이후가 아니라 그 직전에 세웠다는 점에서 가야에 대한 승리 예찬보다는 마지막 남은 가야까지 곧 장악하겠다는 다짐의 목적에 더 방점이 찍힌 순수비라고 할 수 있다.



   창녕 척경비는 마모의 정도가 심해 전문을 해독할 수는 없으나 중간중간 해독이 가능한 부분도 많다. 해독이 가능한 부분에서는 신라의 관등과 직위, 왕을 수행했던 사람들의 이름 등이 자세하게 상술되어 있다. 창녕 척경비를 '순수비'라고 일컫지 않고 '척경비'라고 하는 건 비문 내용에 직접적으로 순수했다는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단, 내용상 진흥왕이 창녕 지역을 순수했음을 충분히 유추가능하기 때문에 진흥왕 순수비로 분류하고 있다. 줄여서 '창녕비'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진출처: 트립어드바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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