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창녕군 술정리에 가면 3층 석탑이 두 개가 있다. 비록 큰 연관은 없는 두 탑이지만 구분을 하기 위해서 동서로 나누었다. 이중 술정리 동 3층석탑이 국보 34호에 해당한다. 제작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3층이라는 점에서 통일신라 그 중 8세기 중엽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아쉽게도 상륜부는 소실되어 술정리 동 3층 석탑은 완전한 모습을 감상할 수는 없다.
창녕군은 고대 삼국시대에 비화가야가 있던 땅으로 진흥왕 대에 신라로 편입되었다. 비화가야는 물론 가야 전부가 진흥왕 대에 신라로 병합되었는데 진흥왕은 멸망시킨 가야 왕족, 귀족, 백성들이 안정적으로 신라의 사회에 귀속될 수 있도록 인치를 베풀어야만 했고 옛 가야 땅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고대사회에서는 왕권을 강화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정복전쟁을 통한 영토확장이고 민심을 수습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사찰을 건립하는 것이었다. 술정리 동 3층 석탑이 어떤 사찰의 석탑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석탑을 통해 진흥왕 이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도 계속 가야 땅에 신라 왕실 지원으로 사찰을 건립했음을 가늠해볼 수 있다.
상륜부가 없어서인지 이 석탑은 언뜻 평범해보일지 모른다. 평범해보인다는 안정감 있는 비례미를 완벽하게 구사했다는 뜻이다. 안정감 있는 이 석탑의 조형미는 불국사 3층 석탑(석가탑)과 양식면에서는 동일하다. 즉 신라 중대 당대의 전형적인 양식을 모범적으로 잘 따른 케이스다. 다만 다소 심심해보일 수 있는 탑에 기단부를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의 2단을 겹쳐 산뜻한 가벼움을 더 했다. 지금은 확인할 수 없지만 탑 주변으로 돌림돌을 놓았던 흔적이 발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