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의 중상류가 흐르는 충주, 여주, 원주 등에는 유독 폐사지가 많다. 오죽하면 남한강변을 따라 폐사지 투어도 있을 정도다. 폐사지가 많다는 것은 한때 번성했던 곳이 지금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공간으로 쇠락했다는 뜻이다. 항공이나 고속도로 따위 없던 시절, 육로와 수로만이 존재했던 시절 남한강은 남쪽에서 서울로 올라오기 위해선 반드시 거쳐야 하는 수로의 요충지였다. 교통의 요충지에는 사람이 몰리는 법. 사람이 몰리면 마을이 커지며 도시가 되고 역동적인 기운을 뿜게 된다. 따라서 남한강변에는 돈많은 상인들이 투자한 큰 규모의 사찰들이 제법 있었다. 그러나 산업화를 거치며 남한강변은 더 이상 교통의 요지가 아니게 되었다. 고속도로가 남한강변을 빗겨난 것이다. 그 화려하고 시끄러웠던 마을들은 사람들이 떠나며 한적한 시골로 전락했고, 사찰들은 과거의 영예를 모두 놓아준 채 그렇게 폐사되었다.
요즘 어떻게 사느냐고 묻지 마라
폐사지처럼 산다
요즘 뭐 하고 지내느냐고 묻지 마라
폐사지에 쓰러진 탑을 일으켜 세우며 산다
나 아직 진리의 탑 하나 세운 적 없지만
죽은 친구의 마음 사리 하나 넣어둘
부도탑 한번 세운 적 없지만
폐사지에 처박혀 나뒹구는 옥개석 한 조각
부둥켜안고 산다
-정호승 <폐사지처럼 산다>
죽은 터를 무슨 재미로 보냐며 폐사지에 반감을 가질 수 있으나 폐사지에선 그리스 신전에서나 느껴볼 수 있는 폐허적 감각을 만끽할 수 있다. 유홍준 교수는 마음이 울적하거든 가을 노을이 질 때 폐사지로 떠나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마음이 울적하진 않았으나 아버지를 모시고 원주의 폐사지를 찾은 적이 있다. 하필 가을이었고 석양이 타고 있었다. 그런데 유독 나보단 아버지가 유난히 그 소멸의 감각에 반응하셨다.
원주에는 유명한 폐사지가 3군데나 있다. 흥법사지가 따로 떨어져 있고 거돈사지와 법천사지가 가까운 거리에 붙어 있다. 법천사는 신라 하대에 '법고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가 고려 초 원주 출신의 스님 지광국사가 사찰을 맡으며 이름을 '법천사'로 개칭하였다. 지금 법천사로 가면 물론 바스러진 주춧돌들만 있고 지광국사탑비가 그 모든 세월의 목격자로 버텨주고 있다.
국보 59호 지광국사탑비는 높이 4.5m의 큼지막한 비석이다. 거북돌은 매끄러운 목라인에 야성적인 표정을 가지고 있다. 거북돌이 받히고 있는 비석의 옆면에는 세로로 길게 용들이 매우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지붕돌도 예술이다. 마치 왕관을 연상하게 하는 모양에 각종 구름과 상상 속의 동물들로 빈틈없이 가득 매워 영롱하고 신비스러운 인상을 주며 마지막 연꽃 봉우리는 탑비의 화룡점정이다.
법천사에는 지광국사 탑비뿐 아니라 지광국사를 위한 현묘탑도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밀반출됐다가 다시 반환되었다. 지금은 서울의 국립고궁박물관 뜰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게 과연 승탑이 맞나 싶을 정도로 부처를 위한 일반 석탑과 모습이 상당히 비슷하다. 당시 고려 사회에서 지광국사가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여실히 증명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