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에 국보 69호 보관되어 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 개국 이후 1397년 심지백을 개국공신에 봉한다는 국가공식임명서이다. 조선 개국과정을 이야기할 때 심지백은 생소한 이름이다. 심지백은 실록에서조차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조선 개국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은 아니라고 추정된다. 심지백에 관련된 인적사항은 오로지 이 국보 69호에 의거해야 하는데, 문서에 따르면 심지백은 함경남도 출신이었다고 한다. 이성계의 고향이 함경도였으니 일찍이 심지백이 이성계를 따랐고, 이성계도 동향이라는 점에서 심지백을 챙겨주지 않았나 싶다.
문서에 따르면 심지백은 1395년 개국공신에 임명되었고 1397년에 녹권이 하사되었다. 그런데 조선 건국은 1392년이다. 개국 직후 공신에 임명되지 않았다는 것만 봐도 심지백이 역할이 두드러져 보이진 않는다. 그렇다면 왜 구태여 뒤늦게 심지백은 개국공신에 임명되었을까. 실록에 의하면 1392년부터 1397년까지 여러 차례 개국공신 임명이 이루어졌고 무려 1400여 명이 녹권을 받았다고 한다. 심지백이 공신에 임명됐을 땐 74명이 함께 임명되었다. 물론 그에 합당한 재산도 받았다. 심지백의 경우 문서의 내용에 따르면 밭 15결과 가문의 땅, 자제들의 벼슬 등을 하사받았다. 즉 태조 이성계가 아주 작정하고 공신들을 임명했다는 뜻인데, 이성계가 개국 직후 혼란스러웠던 정국을 안정화시키기 위함이거나 혹은 나중에 왕자의 난을 일으키게 될 이방원 휘하 왕자들을 견제하기 위함이 아니었나 싶다.
이렇듯 국가의 공식기록이 아닌 문서를 통해서도 정사에 미처 수록하지 못한 내용들을 알 수가 있고, 이를 통해 당대의 사회상 혹은 정치상을 유추해볼 수도 있다. 국보 69호인 심지백 개국원종공신녹권은 비록 예술품이 아니라 미학적 가치는 없지만 사료적인 가치는 값지다. 심지백 개국원종공신녹권은 국어학적으로도 가치가 상당하다. 표기기법이 이두가 많이 사용되어 한글 창제 직전 한국인들의 글자사용형태를 분석하기 좋은 자료이다. 아울러 목활자로 찍힌 인쇄문이기에 당시 인쇄술을 가늠해볼 수 있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개국원종공신을 임명한 녹권은 기록상 58명에게 하사했다고 하는데 현재 남아 있는 점은 7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