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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 Mar 22. 2020

[국보 70호] 훈민정음에 내재된 사회역사적 의미

숭례문이 화재로 전소되어 보수공사를 하던 도중 일각에선 국보 1호를 바꾸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때 숭례문을 제치고 압도적으로 투표를 받았던 국보가 '훈민정음'이었다. 이전까지 훈민정음이 우수성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어도 훈민정음이 국보 70호임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없었다. 설문결과와 더불어 훈민정음이 국보 70호라는 사실이 퍼지면서 사람들은 '훈민정음' 같이 우리의 얼을 대변하는 글자가 어째서 70번째이냐며 호통치던 분들도 있었다. 몇 번인가 말했지만 국보 넘버링은 우수성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고 등재 순서가 기준이다. 결코 훈민정음의 값어치가 70번째라는 뜻이 아니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우리의 글자인 훈민정음에 대한 애착이 이 정도로 깊다는 훈훈한 결과였다.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라는 글자 훈민정음과 그 글자 안에 내재된 철학적 이념들은 무궁무진한 해설과 해석의 영역을 담보해주고 있다. 덕분에 훈민정음에 대한 연구는 다방면에서 걸작에 가까운 연구가 아직까지도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그 모든 자료들을 일일이 제시할 수가 없다. 또한 구태여 훈민정음의 위상에 찬양만 하는 글을 추가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대신 이번 글에선 훈민정음의 창제 배경과 관련되어 역사학자 강만길 교수의 해석을 소개하고자 한다. 


사진출처: 한글문화연대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직접적인 계기나 배경, 이유에 대해서도 너무나도 많은 설들이 다양하게 존재한다. 정치적 입장, 언어적 입장, 문학적 입장, 예술적 입장, 철학적 입장, 역사적 입장, 종교적 입장 등등 전부 각자의 시선에 따라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이유를 설명한다. 한 가지 확실한 건 훈민정음은 지배층을 위한 글자는 아니라는 점이다. 지배층들은 한자를 쓰고 있었으며 그 생활에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결국 백성들을 위해서였다는 건데, 강만길 교수가 지적하고 있는 창제 동기란 백성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훈민의 수단이라는 것이다.


글자가 훈민의 수단? 그렇다면 그 훈민의 수단이 왜 갑자기 조선 초기에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는가? 이미 조선 초기 정도 되면 어느 정도 백성들의 의식수준이 이전보다 높아졌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의 의식수준이 조선시대 백성들의 의식수준과 다르듯이, 조선시대 백성들도 삼국시대나 고려시대 백성들의 의식수준과 판이했다. 더군다나 고려 말부터 몽골족과의 침입을 막아내는 과정에서 민족의식과 자의식이 미친듯이 상승했고 몽골과의 전쟁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지배층을 보면서 백성들은 더더욱 의식수준이 향상되었다. 그러니까 조선 초 지배층은 이전 시대보다 더 똑똑해진 백성들을 관리해야 했던 거고 백성들이 쉽게 익힐 수 있는 글자야말로 가장 적합한 수단이라고 세종대왕은 판단했다. 따라서 우리가 경탄해야할 대상은 세종대왕의 애민정신이 아니라 세종의 통찰력과 안목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수준이 높아진 대중들이다.




한글 창제는 한 사람의 자애심이 바탕이 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스스로 자의식을 높여감으로써 얻을 수 있었던 전리품과 같은 것이었다. 한글은 지배권력의 처지에서 보면 통치수단의 하나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것을 만들지 않을 수 없게 한  백성의 처지에서 보면 값높은 전리품이었다.


-강만길, <한글 창제의 역사적 의미>



한글의 목적은 한글이 반포된 이후 최초로 진행된 작업이 무엇이었는가를 살펴보면 더 확실하게 가늠해볼 수 있다. 한글 창제 이후 가장 작성화된 문서는 '용비어천가'라는 악장이었다. '용비어천가'는 조선 건국의 정당성과명분을 찬양하는 노래이자 가사이다. 당시 백성들 상당수가 고려시대를 겪은 백성들이었고 고려시대를 살았던 백성들 입장에서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가 고려와 어떻게 다른지 조선 건국 세력은 백성들에게 조선이라는 나라의 위대함과 차별성을 설파해야 했다. '용비어천가' 발표 2년 후 제작되었던 '월인천강지곡' 역시 같은 맥락이며 '석보상절'이란 불경을 정리한 서적 역시 불교라는 양반보단 백성들에게 더 친근한 종교를 이용해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려던 목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한글로 쓰여진 의례서, 예를 들어 <삼강행실도> 나 <열녀도>, <효경> 등은 전부 한글을 사용해 백성들에게 유교적 도덕 원리와 질서를 주입시키려는 의도였다. 그러니까 한글은 세종이 지배체제를 더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공고히 하기 위해서 창안한 수단의 하나로 자의식이 높아진 백성을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한 최적의 수단이었다.


사진출처: 메타국어


한글은 온전히 백성의 몫이었다. 한글 창제 후 한자와 한글은 중세시대에 공존되다가 조선 후기부터 한글의 위상이 커지더니 근대시기에 이르러선 한글의 위상이 한자의 위상을 압도해버렸다. 이는 백성과 국민이 주인이 된다는 근대적 세계관이 신분제를 근간으로 하는 중세적 세계관을 압도하는 양상과 동일하다. 한글이 창제되고 백성들에게 사용되면서 백성들의 자의식은 월등히 높아졌다. 다른 말로 말해 한글이 천한 글자라는 위치에서 탈피해 국문의 자리로 굳혀가는 과정이 만백성이 평등하게 나라의 주인이 되어가는 과정이자 근대화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역사를 거시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한글 창제는 세종대왕에게 요구된 시대적 과제였다.



세종연간의 과학 및 문화면의 발전은 지배권력이 베푼 소위 민본정책이나 어여삐 여김의 소산이라기보다 백성세계의 움직임이 역사의 표면에 반영된 결과라 이해해야 한다.


-강만길, <한글 창제의 역사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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