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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 Jan 07. 2020

[국보 6호] 탑평리 칠층석탑, 정중앙의 정체는?

   국보 6호는 충청북도 충주에 있는 탑평리 칠층석탑이다. 본래 석탑 앞에는 절이름이 붙어 있어야 하고, 만약 절을 불타버린 채 탑만 남아있을 경우 과거 그곳에 있었던 사찰의 이름을 따라 "~지 n층 석탑"이라고 부르는 것이 석탑 명명법이다. 그러나 국보 6호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은 사찰이름이 들어가지 않고 석탑이 위치해 있는 동네이름을 땄다. 이는 탑평리 칠층석탑이 과거에 어떤 사찰의 석탑이었는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만들어진 연대는 신라 하대로 추정할 뿐이며 다음과 같은 설화만 전해오고 있다. 신라 38대왕인 원성왕 대에 신라 국토의 남쪽 끝과 북쪽 끝에 각각 똑같은 보폭에 똑같은 속도로 걷는 두 사람을 세워두고 동시에 출발하게 해서 만났던 곳이 지금의 충북 충주의 탑평리였다고 한다. 원성왕은 국토의 정중앙을 기념하고자 이곳에 칠층석탑을 세웠던 것이다. 이런 설화 때문에 국보 6호는 공식명칭인 '탑평리 칠층석탑'보다는 '중앙탑'이라는 애칭으로 더 많이 불리고 있다. 



   주목할만한 점은 국토의 정중앙을 기념하기 위해 사찰이나 사당을 만들었다는 게 아니라 석탑만을 세웠다는 것이다. 유홍준 교수는 이 설화를 미루어보아 애시당초 사찰이 없었을 수도 있다는 학설을 제기했다. 실질적으로 석탑 주변을 발굴해봐도 유적이 나오긴 나오된 사찰의 흔적을 전혀 찾을 수도, 관련된 기록도 없기 때문이다. 충주는 통일 이후 신라의 중원경이라고 불리며 제2의 수도 역할을 해왔다. 통일 이후 신라는 수도 경주가 동쪽으로 지나치게 편중된 까닭에 통일된 국토 중 지리적 요충지에 5개의 특별행정구역인 소경을 설치했다. 지금으로 비유해보자면 특별시, 광역시, 특별자치시에 해당하는 도시들이다. 이 5가지의 소경을 5소경이라고 하는데 그중 가운데 '중' 자를 사용하는 소경은 충주였다. 즉 중앙탑은 5소경 중 중원경 충주의 가장 중심적 도심에 국토의 중앙을 상징하기 위한 의도로 세운 기념탑이었다는 것이다. 하물며 중원경 충주가 경주 다음 가는 도시였고 수도 경주의 치우침을 보완해주고 있으니 충분히 기념할 만한 조형물일 수 있다.



   중앙탑이 일반적인 사찰 석탑과 다를 수 있다는 근거는 조형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중앙탑은 일반 사찰 석탑과는 이질적인 형태를 하고 있다. 우선 신라 하대에는 대부분이 3층으로 건축되었음에도 중앙탑만은 쉽게 찾아볼 수 없는 7층의 형태이다. 아울러 확실한 소실점을 찍고 축소되어가는 비율이 극단적이다. 이는 종교적 숭고함보다는 상징적인 위엄을 노렸다고 볼 수 있다. 



   현대사의 충주는 고속도로가 빗겨가며 다소 중요성이 등한시된 경향이 있으나, 도로가 뚫리기 전까지 충주는 우리 국토의 정중앙 역할을 하고 남한강을 통해 서울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교통의 요지요, 삼남의 물산이 총집결하던 대도시였다. 전근대 사회 화려했던 충주의 기억을 유일하게 증명해주고 있는 탑이 이 '탑평리 칠층석탑' 아니 중앙탑일 지 모른다. 


사진출처: 충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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