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면서 우리에게 고구려와 고려는 시간보다도 공간적으로 너무 먼 역사가 되어버렸다. 두 국가의 문화재가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두 나라 모두 행정의 중심이 한반도의 북부에 쏠려 있다보니 남한에서 두 국가의 흔적을 찾는 일이 쉬운 일만은 아니다. 그나마 고려야 한반도 전체를 차지하고 있었다지만 삼국시대의 고구려는 더더욱 남한 땅에서 낯선 국가다. 그럼에도 남한에 남아 있는 몇 점의 소중한 고구려의 문화재들을 통해 고구려를 주문해볼 뿐이다. 오늘은 고구려의 문화재들 중 남한 땅에서 출토된 고구려 불상에 조명을 비출 차례다.
아마 가장 유명한 고구려의 불상은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일 것이다. 이 불상은 워낙 유명하다보니 현재 남아 있는 유일의 고구려 불상으로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고구려 불상은 다행히도 몇 점 더 남아 남한 곳곳의 박물관에서 소장 중이다. 고구려는 4세기경 불교를 공인한 이후 불교예술은 그렇게까지 발달하지 못했던 듯하다. 불상의 예술성도 더디게 발전하다가 고구려 후기에 가서 고구려 양식이 자리잡는다. 6세기 후반 많은 학자들은 출토된 고구려 불상들을 통해 당시 고구려에선 하나의 광배에 3분의 부처를 조각하는 양식이 유행했던 것으로 추정한다. 이를 '1광3존불' 양식이라고 하는데 가운데 여래상을 두고 좌우에 보살을 배치하는 형태다. 6세기 후반 고구려에서 제작된 3개의 불상이 모두 1광3존불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세 불상 모두 삽 형태의 광배에, 광배의 화운무늬와 불상들의 옷주름이 이상적으로 조화를 이루며 강렬한 인상을 준다. 세 불상 중 하나가 국보 72호에서 소개되었던 계미명 금동삼존상이다. 세 불상은 간송미술관, 삼성리움미술관, 국립청주박물관에서 소장 중인데 그중 국보 85호의 주인공은 삼성리움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금동신묘명삼존불입상이다.
금동신묘명삼존불입상의 광배 뒷면에 다음과 같은 명문이 적혀 있다.
"X경 4년 신묘년에 비구 도X는 선지식인 방루, 천노 아왕, 아거 5인과 함께 무량수불상 1구를 만들어 원컨대 돌아가신 사부모님이 태어날 때마다 마음속에 항상 여러 부처님과 선지식을 만나시고 미륵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함께 한 곳에 태어나서 부처님을 뵙고 법문을 듣기 바랍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부모'가 스승님을 말하는 건지 부모님을 말하는 건지 모르겠으나 아마 그분이 돌아가신 후 좋은 곳에서 환생하시고도 주변에 좋은 분들만 가득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제작되었다. 신묘년이라고 적혀 있으니 6세기 후반으로 계산하면 서기 571년으로 추산된다. 이 불상은 한번에 주조하지 않고 광배-본존불-대좌 별로 따로 주조하여 조립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그래서인지 대좌를 잃어버리고 광배와 본존불의 결합형태만 남아 있다. 본존불과 두 보살 세 부처의 얼굴은 녹슨 세월이 묻어있지만 이목구비만은 뚜렷하게 남아 있다.. 유홍준 교수는 이 불상을 보고 "디테일이 다소 소략하여 거친 맛이 있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고구려 불상의 전형적인 특징이 더 드러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