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없는 바탕의 세계를 오랜 시간 가만히 들여다본 적이 있는가. 나도 모르게 관념과 현실 모두로부터 벗어나지는 일시적 허무주의. 마치 늪에 빠지듯 '공'의 세계에 강제로 초대된 멍함. 그 마비된 상태에서 '아무것도 없음(無)'을 사색하게 되는 물질과 비물질 사이의 길항작용. 국보 97호 청자 음각연화당초문 매병은 연꽃들이 음각으로 처리되어 있어 그 무늬가 화려하거나 튀지 않는다. 흐릿한 무늬말고는 일체의 장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청자 음각연화당초문 매병에는 무언가 있는 듯 실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내게 보이는 저 연꽃들은 물질의 세계가 아니라 저 너머의 세계 속에 존재하는 비물질로 여겨지고 이 청자매병은 그 경계선 혹은 파수꾼 혹은 길잡이를 해주는 것만 같다.
청자 음각연화당초문 매병의 가슴은 다른 매병에 비해 볼륨감이 살짝 더 강조되었다. 반면 바닥 부분은 두꺼운 편이 아니다. 전체적인 인상을 비대해지게 느껴지지 않게끔 볼륨 있는 가슴을 지탱할 수 있는 선에서 생각보다 얇게 제작되었다. 매병의 상단부와 하단부 두께 차이가 나면 허리는 급격하게 줄어들어 역동적인 활력을 풍기지만 이상하게도 이 매병은 대조되는 상단부와 하단부가 아주 부드럽고 유려하고 정적인 곡선으로 이어져 있다. 아니 이 매병의 자태는 곡선이 흐르고 있다.
아무것도 무늬가 그려지지 않는 순청자들은 조형미와 고려비색의 원색에 취하게 된다. 양각이나 상감화가 그려진 청자에는 장식성과 그림의 율동에 마음이 들뜨게 된다. 그리고 오로지 음각으로만 무늬는 사색하게 된다. 이토록 고려청자는 용도에 따라 서로 다른 멋을 내기도, 그리고 형태에 따라서도 서로 다른 감상을 만들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