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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 나그네 Jun 22. 2020

독일, 시민을 만나다

독일 경제 성장력의 원동력 시민의식일까, 아니면 선민의식이었을까.

그토록 축구를 열심히 봤던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축구에 그다지 흥미가 없었지만, 2002년만큼은 달랐다. 국가가 축제의 분위기 속에 들썩였고 축구 없이는 일상 대화 자체가 어려울 정도였던 시기였으니까 말이다. 기대는 했지만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16강 진출.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이탈리아와 스페인과의 대결에서도 승리를 쟁취했던 그 순간 대한민국 모든 사람의 엔도르핀과 아드레날린의 농도는 그 어느 때보다 진했을 것이다. 고조된 감정은 마지막 결승 관문인 독일과의 경기를 앞두고 있던 그때 절정에 달했지만, 후반전 골문이 뚫리면서 흥분의 풍선도 바람이 빠진 듯 가라앉고 말았다. 4강 진출 자체로도 대단한 기록이었지만, 독일까지 이겼더라면 결승까지 가는 것인데 하는 아쉬움도 크게 남았다. 


그때부터 독일 하면 2002 월드컵 결승 진출을 제지했던 나라라는 이미지가 오랫동안 기억 속에 자리 잡았다. 독일과 관련해서는 사실 축구 말고도 히틀러, 나치, 베를린 장벽, 바이마르 헌법, 스포츠 강국, 파독 광부, 파독 간호사 같은 이미지가 떠오르긴 했지만 그 어떤 것도 축구보다는 강력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아마 베를린 여행을 하지 않았다면 아직도 독일 하면 축구와 관련된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올랐을 것이다.


그만큼 독일과 관련해서는 잘 아는 바가 없었다. 관광지로 베를린 장벽이나 브란덴부르크문, 상수시 궁전, 포츠담 정원 정도 독일에 있다는 것을 아는 정도였다. 공교롭게도 알고 있던 관광지가 모두 베를린에 있었고 독일 여행지로 베를린을 선택했던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또, 굳이 변명하자면 다른 도시를 찾아보고 알아볼 시간도 없기도 했다. 유럽 배낭여행을 가기로 한 것도 다소 갑작스럽게 정하기도 했던 터라 런던 입국/이스탄불 출국이라는 두 가지 점만 찍어둔 채, 그 두 도시 사이에 무수한 점들은 매 순간 이어나가야 했다. 주로 마지막 여행지를 떠나기 이틀 전, 때로는 바로 전날 다음 여행지를 정하기도 했다. 좋은 점이었다면 무엇인가 정해진 시간 속에 구속 받지 않을 자유는 있었지만, 부족한 계획 때문에 모든 순간 새로운 계획을 빠른 시간 안에 만들어야 하는 순발력을 발휘해야만 했다. 


그렇게 순발력을 발휘해 여행을 했던 베를린은 독일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던 도시였다. 그것은 관광지에서 받은 감명도 아니었고, 베를린 장벽을 보며 분단국가의 아픔을 되새길 수 있어서도 아니었다. 겨우 4박 5일 정도의 시간을 여행했지만 독일 시민들의 일상생활 모습이 축구를 밀어내고 새로운 이미지를 자리 잡게 만들었다. 

상수시 궁전을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이동하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트레인을 타고 버스도 몇 번은 갈아탔던 것 같다. 날씨도 여름이라 목이 바짝바짝 마를 정도로 더웠는데 더 견딜 수 없도록 했던 것은 에어컨도 나오지 않는 버스 안이었다. 버스를 타면 조금은 오싹하게 느껴질 정도의 냉기가 흘러나올 것이라 예상했건만 그렇지 않았다. 조금만 더 있으면 틀겠지 생각했지만 승객이 많아져도 에어컨은 작동되지 않았다. 유럽 배낭여행 중 가장 더웠던 순간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괜찮은지 주변을 돌아봤지만 사람들이 땀을 흘리고 있을 뿐 찡그린 사람은 없었다. 오직 나의 표정만이 여름날 무더위 같았을 뿐이었다. 어쩌면 공공의 영역에서도 절약하는 것을 자연스러운 가치로 여기는 독일 시민들의 암묵적인 사회적 합의 덕분에 가능했던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그 같은 절약의 모습은 마트에서도 쉽게 볼 수 있었다. 먹는 것을 좋아해서인지 마트 자체를 좋아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새로운 나라를 갈 때마다 빠지지 않고 방문했던 곳이 마트였다. 그 나라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즐겨 먹는 음식이 무엇인지도 궁금했고 주머니가 가벼운 여행자의 식사를 해결해줄 수 있는 덕분이기도 했다. 독일 마트 역시 그 같은 목적을 쉽게 채울 수 있었다. 가격은 놀랍게도 유럽 국가 중에서 가장 저렴한 편이었다. 독일 현지 식당 물가가 그렇다고 저렴한 것은 또 아니었다. 외식을 하지 않는 이상 한국보다 생활비가 적게 들 것 같았고 생활비를 더욱 절약할 수 있게 하는 장면을 하나 보게 됐다. 바로 재활용이었다. 재활용 기계가 마트에 있었는데, 플라스틱병을 하나씩 투입하면 재활용 마일리지 같은 것이 적립되는 것이었다. 큰 금액이 적립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재활용하는 습관이 체화된 것 같았다. 짧은 시간 머물렀지만 정말 말 그대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재활용 기계에 빈병을 넣고 마일리지를 적립하고 있었다. 잘 설계된 국가 시스템과 시민들의 성숙한 의식이 결합된 장면을 볼 수 있는 순간이었다. 

여행을 하면서 그 나라 시민들을 보면서 놀랐던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더욱 놀랐던 것은 독일인 시민들의 영어 실력과 선진국 시민 의식이었다. 유럽 국가에서 영국을 제외한 국가 중, 영어 구사가 가장 뛰어났던 나라가 독일이었다. 사실 영어를 모두 잘해야 한다는 법 같은 것은 없지만, 독일 사람들은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 않는 나 같은 사람과 쉽게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접촉했던 사람들 중 그 어떤 누구도 영어로 의사소통이 어려웠던 사람은 없었다. 한번은 관광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려던 때, 갑자기 지하철 고장 사고가 있어 다른 교통수단을 급히 선택해야 했었다. 트램이나 버스를 어디서 탈까, 어느 방향에서 타야 할까 구글맵에 의지하며 혼자 머뭇거리고 있자, 어떤 중년의 남자분이 인자한 모습으로 다가와 유창한 영어로 어떤 것 때문에 어려움이 있는지 물어보며 먼저 도움을 주었다. 불쌍하게 보였을 수도 있겠지만 선진국의 시민의식은 마치 이런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것만 같았다. 이 같은 시민 의식 덕분에 독일은 전쟁 후 폐허의 상황에서도 그리고 통일 후 흔들리는 경제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겠다 싶었다. 

2018 러시아 월드컵 마지막 경기. 대한민국은 독일과 16년 만에 러시아에서 월드컵 경기로 다시 만났다. 이번에는 이겼다. 지난 2002 월드컵 4강전을 설욕하듯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가운데 짜릿한 승리를 가져다줬다. 기뻤다. 기억에 남는 월드컵 경기 중 하나가 될 것 같지만, 그렇다고 독일에 대한 이미지가 다시 축구로 돌아갈 정도는 아니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직접 가본 것에 감흥이 더 오래 남았기 때문일 것이다. 짧은 여정이었지만 국가 시스템 기반이 탄탄하게 구축된 것을 지각할 수 있었고, 또 그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독일 시민들의 모습이 무척이나 강렬했기 때문이었다. 독일 하면 독일 사람들의 그 시민의식이 아주 오랫동안 생각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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