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는 낭만의 도시로 마케팅이 잘 된 곳 중 하나이자 많은 사람들에게 로망의 도시일 것이다. 일본에는 일명 ‘파리병’이라는 것이 있을 정도로 그곳을 다녀온 사람들이 파리에 대한 향수를 많이 느끼기도 한다고 한다. 그만큼 매력적이 도시이자 아름다운 도시일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파리로 향했다.
지하철을 타고 숙소를 이동하면서 너무 더럽다는 생각을 내내 했다. 지하철 역주변에는 이상한 악취마저 풍겨왔는데 그건 아무데서나 볼일을 보고 생겨난 결과물이었다. 유럽 대부분 도시는 공중 화장실을 이용하려면 0.5~1 유로 정도의 비용이 들었다. 그 비용이 아까워서 아무 곳에서 볼일을 봤을 수도 있을 것이고 역 주변에 화장실 자체가 많이 없었던 탓도 있을 것이다. 파티용 머리를 오랫동안 유지하기 위해 향수가 발명되고, 오물을 아무 곳에나 버려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 양산이 만들어졌다는 파리의 첫 이미지는 비위생 그 자체였다. 물론, 호텔 주변이나 유명 관광지는 깨끗했지만 시민들이 이용하는 대중교통이 이렇게 비위생적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다행히 야경 속에 녹아있는 에펠탑은 멋지다는 한 마디로 요약하기 부족했고, 베르사유 궁전과 왕비의 정원은 그 화려함에 탄성을 절로 자아내게 하는 동시에 이 모든 것이 시민들과 농노들의 고혈을 짜낸 결과물이라는 생각에 깊은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그 유명하다나는 모나리자와 모나리자 사진을 찍으려는 중국인들도 많이 봤다. 오르세 미술관에서는 교과서에서나 자주 보던 밀레의 이삭줍기도 관람하면서 알고 있는 그림이 하나라도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스쳐지나갔다. 그 외에도 퐁피두 센터, 몽마르트 언덕, 그리고 그 언덕의 화가들과 노트르담 성당까지. 파리는 관광객을 끌어들이는데 안성맞춤이었다. 예술을 잘 모르는 일반인들도 센느강을 걷고 있노라면 당장이라도 걸작을 배출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마저 들기도 했고, 상젤리제 거리를 걸을 때는 샹송이라도 불러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런 낭만의 도시가 주는 아우라 덕분인지 1유로가 조금 넘는 바게트 빵의 식감은 겨울 솜이불처럼 폭신폭신했다. 갓 구운 바게트 빵의 바삭함과 촉촉함,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들리는 귀를 사로잡는 소리가 아직까지 기억 속에 남는다. 그도 그럴 것이 여행 내내 쉬지 않고 바게트 빵을 간식 혹은 식사처럼 많이 먹었다. 아무리 프랑스 밀가루를 수입해서 만드는 빵집이 한국에 있다고 하더라도 방부제 처리가 전혀 되지 않은 프랑스의 그 재료로 만든 음식은 그곳에서, 그 순간에만 먹을 수 있었기에 주식처럼 많이 먹었다.
파리는 정말 강력했다. 관광지는 그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이 아름다웠고 불어의 알파벳조차 몰랐지만 그 언어조차도 예술적으로 들렸다. 파리지앵으로 살아가는 시민들의 삶이 부럽다는 생각도 했었지만 관광객을 노리는 집시들 덕분에 그 생각이 조금은 사라지게 됐다. 관광지를 가는 곳마다 집시들이 있었고 기부금을 내라며 길을 막기도 했고 에펠탑 모형을 사라며 길을 가로 막기도 했다. 나보다 체격이 두 배쯤은 좋은 흑인 집시가 몽마르트 언덕을 올라가는 길을 막으며 에펠탑 모형 강매를 시도했다. 심지어 손목까지 잡아서 순간 놀라기도 했다. 그 에펠탑 모형 자체가 비싼 건 아니었지만, 지갑을 꺼내는 순간 그 지갑을 소매치기 하는 것이 에펠탑 모형 판매의 주 목적이라는 것을 들었던 터라 강력히 거부했다. 그렇지만 그 강력한 힘을 이겨낼 재간이 없었고 마냥 버티기만 했었는데,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일행이 불쌍하게 보였는지 털어도 별로 나올 것이 없어 보였는지 보내주라는 손짓을 했었다.
다행히 그렇게 지갑을 지킬 수 있나 싶었는데 지하철에서 결국 지갑을 소매치기 당했다. 지하철을 내릴 때서야, 가방은 열려져 있었고 지갑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지하철 표도 지갑에 넣어뒀던 터라 개찰구조차 통과할 수 없어 안절부절 못했다. 이를 불쌍하게 여긴 어떤 흑인 아저씨가 본인의 티켓을 넣어주며 개찰구의 문을 열어줬다. 고개를 꾸벅 숙이며 “땡큐”라는 말을 5번은 넘게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곧장 숙소로 달려가 한국에서 잠을 자고 있던 동생을 깨워 모든 카드를 정지 시켰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예비 카드를 숙소에 보관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살아생전 소매치기라는 것은 처음 당해봤다. 나름대로 살면서 가장 비싼 지갑을 산지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비싼 지갑을 쓸 운명은 아니었나 보다. 그 때문인지 그 이후로 지갑에 대한 욕심은 거의 없었던 같다. 브랜드도 상관없이 그냥 신분증만 잘 넣을 수 있는 정도로 떨어지지 않으면 문제없을 정도의 것으로 쓰고 있다. 덕분에 지갑에 대한 허영심을 버리는 계기도 됐었다. 소매치기로 잃어버린 것도 있지만 얻은 것도 분명 있었다. 덕분에 이후 관광지에서는 소매치기를 더욱 조심하게 되기도 했었고 집시로 보이는 사람을 조금은 더 잘 알아볼 수도 있게 됐으니까 말이다.
파리를 다녀온 이후 ‘파리병’ 같은 징후는 전혀 없었다. 다만, 파리 트라우마가 생겼다. 파리 하면,‘집시’,‘소매치기’와 같은 것이 먼저 떠올라 다시 방문하고 싶다는 생각이 한 동안 들지 않았는데, 다시 한 번 그 순간을 돌이켜 보니 소매치기와 집시도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렇게 오랫동안 돈으로 살 수 없는 잊지 못할 ‘기억’이라는 추억을 새길 수 있고 파리를 더욱 강렬하게 머릿속에 남길 수 있는 계기가 됐으니까. 다음에 파리를 간다면 지갑은 숙소에 두고 몽마르트 언덕에서 집시가 판매하는 에펠탑 모형도 하나 구매해 봐야겠다. 어쩌면 또 다른 추억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