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내맡기기&감정을 알아차리고 내맡긴다. / 무당벌레
유튜브 써니즈 오디오채널을 즐겨 듣는다. (본다라는 표현이 맞지만 오디오 채널이므로 영상을 보기보단 듣기를 한다.) 사연을 읽어주시며 구독자분의 궁금증에 대한 답변을 하는 내용이었다.
[ 도토리묵 월남쌈 ]
도토리묵
파프리카(빨, 노)
사과
청경채
라이스페이퍼
< 양념 >
진간장
와사비
참기름
통깨
마이클 싱어의 ‘삶을 내맡기기’에서 누가 나에게 부탁을 하거나 어떤 상황이 내게 왔을 때, 그냥 다 오케이, 예스하면서 받아들여야 하는지 헷갈려서 써니즈님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질문자분의 질문처럼 나도 이와 같은 생각을 자주 하는 편이다. 온전히 삶을 세상에 내맡기기로 했을 때 세상이 선물해 주는 결과에 순응하고 경험하며 살아가려 하지만, 어떤 상황이 내게 왔을 때나 타인이 내게 부탁을 했을 때 무조건 오케이 하며 따라야 하는가였다.
오케이만 하다 보면 내가 하기 싫어지거나 그로 인해 목표한 바가 무너지거나 많은 부탁을 들어주느냐고 지칠 때가 있다. 그럴 땐 그것이 세상이 주는 교훈이고 그 교훈이 지혜가 되는 선물을 받는다고 생각하는데, 선물을 받고 기뻐만 하고 싶지만 슬픔과 좌절이 같이 오는 경우가 있을 때는 ‘내맡기기’에 대한 의문점이 가슴속에서 올라온다.
써니즈 오디오에선 ’ 감정을 알아차리기‘를 사견으로 얘기해 주셨는데 ’ 선택을 내맡기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내맡기기‘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림으로 몸과 마음의 힘을 빼는 것이라고 한다.
알아차리기를 통해 어디에 힘이 들어가 있는지를 알 수 있게 되고, 힘을 빼서 긴장이 풀려 편안해지는 방향으로 가면 되는 것이다.
나는 선택을 내맡기는 경우에 집중했었는데 이번 기회에 감정을 내맡기고 알아차리는 것에 의식을 둬봐야겠다.
겨울잠을 자던 무당벌레가 살금살금 낙엽밖으로 몸을 보였다. 어릴 적엔 이 조그마한 곤충이 귀엽기만 했는데 고등학생 이후부터는 무서워졌다. 같은 곤충이고 같은 사람인데 난 왜 이아이를 무서워하게 되었을까? 또 지금은 왜 또 어릴 적처럼 무서워하지 않게 된 걸까?
사실 무섭긴 하다. ‘이 조그만 곤충이 콕! 하고 내 손바닥을 물면 어떡하지?’, ‘독이 있어서 배탈이 나면 어떡하지?‘ 등의 두려움이 들었지만 용기 내봤다. 그 결과 내 손바닥에 이 귀여운 아이를 올려서 차가운 벽돌바닥에서 포근한 잔디에 옮겨 줄 수 있게 되었다. 분리수거함 벽돌바닥에서 잘못하면 밟힐 수도 있지만 난 그걸 예방해 준 것이다.
이 행위로 행복해졌다. 작은 무당벌레에게 삶을 선물해 준 것만 같다. 어쩌면 고등학교 이후 20대 후반까지 무당벌레가 무서웠던 건 용기 내는 법을 몰라서이지 않을까? 용기를 내기보단 불편한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갇혀 앞으로 나아갈 생각이 없게 되었다가,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게 되어 지금은 무서워지지 않게 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