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일에 후회하지 않는 태도.
다시 신입생 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나는 딱히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굳이 굳이 “너는 언제로 돌아가고 싶어?”를 묻는다면, 후회되는 순간들이 떠오르기야 하겠지만. 기억을 하나씩 차례차례 되짚어보지 않는 이상, 내게 마음 한 켠에 늘 ‘후회’라고 품고 있는 사건 같은 건 직관적으로는 딱히 없다.
문득 후회하지 않는 건 내 강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어제 나는 이런 대화를 했었다.
“벌써 2021년, 2022년, 2023년이 지났어..”
“후회 없는 해였어?”
“후회? 무슨 후회? 형은 후회 있었어?”
“없었다고 할 순 없지.”
“어? 그럼 인생에서 가장 큰 후회가 뭐야!”
“인생에서 가장 큰 후회... 잠깐만...”
“아 안 말해도 돼. 안 말해도 돼."
"아 그래?"
벌써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내 말에, 형은 내게 후회를 물었다.
후회 없는 해였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잘 모르겠더라. 그래서 역으로 질문했다. 그러자 형은 기억들을 떠올리고 말을 고르다가 입을 떼려고 했다. 그러나 내가 좋은 내용도 아니니 굳이 힘들게 말할 필요 없으니 말하지 않아도 된다며 이야기를 끊었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은 보통 마음속에 ‘후회’라는 걸 하나씩은 품고 사는 걸까? 나는 그러지 않아서 몰랐는데 말이다.
나는 다시 이런 말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근데 어쨌든 뭔가가 떠오른다는 거잖아? 근데 난, 딱히 떠오르는 게 없어. 지나간 과거에는 후회를 안 하는 편인 것 같아. "
어떤 사람들은 이런 나의 ‘후회하지 않는 성격’을 부러워하기도 하는 것 같다. 여기서 '성격'이라 하면, 타고난 걸까 아님 형성된 걸까?
아마 내가 타고난 부분은 이렇다. 과거를 선명하게 기억하지는 않는다는 거. 뇌리에 또렷하게 박혀있는, 아직도 생생한 순간들? 거의 없다. 나쁜 말로는.. 기억력이 좋지 않다고 할 수 있겠다.
아무래도 섬세한 편은 아니다. 친구가 예전에 해줬던 말을 너무나도 잘 까먹어서 또 묻고, 또 묻고... 그러는 편이다. 내가 친구에게 했었던 말조차 기억 못 해서, “내가 그 얘기를 했었다고?” 되묻는 일도 많다.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는 아마 힘들 거다. 힘들었던 기억들까지도 전부 지고 가야 할 테니까. 이런 소재의 책이나 영화가 꽤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나는 왜 기억력이 안 좋을까!” 하고 투덜댔던 것마저 장점이 될 수 있다. 평범한 기억력 덕에 나는 특별히 마음 아픈 사건을 크게 기억에 남겨두지 않고 잊어버린 채로 즐거운 오늘을 살 수 있는 것도 같다.
“근데 지나간 일에 후회하지 말자는 건 내 인생관이기도 한데, 그렇게 살려고 노력도 해. 잊어버리려고 노력도 하는 거야.”
성향적으로 타고난 부분도 있겠지만, 지나간 일에 후회하지 말자는 것을 인생관으로 가지게 되면서부터는 후회하지 않기 위해 노력도 한다. “에이, 잊자! 다 지나간 일인데 뭐!”라고 자기 암시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지나간 일에 후회하지 않는 성격을 부러워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나는 그러기 위해 애쓰기도 한다.
“난 힘든 일 있어도 하루컷? 그날 밤에만 후에에에엥...”
“울어?”
“아 울진 않아. 연출을... 이해를 돕기 위한... 실제와는 다를 수 있습..”
“아 과장되게 표현한 거야?”
“어어. 이해를 돕기 위한 연출이므로 실제와는 다를 수 있습니다. 아무튼 흐에에엥 하고? 음악 듣고? 일기 쓰고. 일기 써! 난 진짜 다음 날까지는 안 가는 것 같아.”
다음 날까지도 안 가는 것도 부러워할지도 모르겠다. 힘든 일에 몇 주 동안 저기압이던 사람들도 봐왔으니까. 근데 난 한 가지 일 때문에 속상해있는 일은 없다. 그날그날 내 기분도 잘 돌봐주기 때문인 것도 같다.
그러고 보니 바로 엊그저께는 이런 대화도 있었다.
과제를 하던 중 그 과제가 유독 하기 싫어서 고통스러워하며 했던 말이다. “하기 싫은 거 진짜 못 해 먹겠는데, 이런 내가 사회에 나갈 수 있을까?”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싶어 하는 나의 선택적 업무수행능력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러나 친구는 내 질문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의 대답을 내놓았다. ‘사회생활은 잘할 것 같다’는 대답이었다. 고민도 없이 ‘잘할 것 같다’고 단언해 주는 친구에 나는 감동을 와르르 받아버린다.
친구는 나보고 스트레스를 잘 풀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내가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은 ‘친구들한테 찡찡대기’인데, 재미있게도 바로 이 대화와 이 대화 바로 직전에 했던 대화가 역시도 바로 나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인 ‘친구에게 찡찡대기‘에 해당했다.
나: A랑 B과목 과제만 없었어도
나: 시험공부를 아직 시작 못한 대참사는 없었을 텐데
나: 원망할 거야.
L: ㅋㅋ...
나: 원망
나: 원망
나: 분노
나: 격노
나: 분개
L: 과제 얼마나 했는데?
L: 난 이제 읽어야 해.
나: 아
나: 하기 싫어
나: 넘무 하기 쉬러서~
나는 가벼운 스트레스를 받을 땐 이렇게 친구와 대화하곤 한다. 어차피 같은 상황에 놓인, 같은 과제를 해야 하는 처지였으므로 이런 대화는 결코 부담스러운 고민상담이 되지 않는다. 같이 신세한탄하는 것이다. 그저 무언가를 누군가에게 털어놓는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마음이 가뿐해진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친구들의 말에
이렇게 답을 했었다.
“지금이 제일 재밌게 살자.”
저 답장을 보내놓은 후에 이 글을 쓰기 시작했었는데. 글을 다 쓴 지금, 대화방을 다시 확인해 보니 이런 답장이 와 있다.
“인정. “
그리고 돌아가고 싶다던 친구는 이내
다시 이런 말을 덧붙였다.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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