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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ST DO IT, NIKE

나이키가 걸어온 세상

by 찰스킴
나이키의 카피라이팅

너무 저렴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비싸지도 않으면서 남녀노소 부자, 스포츠 선수 다 가리지 않고 신으며 전통과 트렌디함을 갖춘 브랜드, 그것은 '나이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샤넬, 루이비통, 에르메스와 같은 명품 보다 더 뛰어난 가치를 가진 나이키가 걸어온 세상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1. 나이키의 시작은 아식스?

151515.PNG 초창기 나이키의 모습

나이키의 창립자 '필 나이트'는 제품의 기능도 강조 했지만, 나이키를 마케팅에 기반한 회사라고 소개할 만큼 마케팅을 강조했습니다. 나이키 성장의 핵심 포인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필 나이트는 처음부터 신발을 만들어서 판매하지 않았습니다. 카메라 하면 현재 일본의 니콘, 캐논 등이 떠오르지만 역사적으로 카메라의 원조는 독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때 일본 카메라 회사들이 독일제를 따라잡기 시작합니다. 필 나이트의 선견지명이 발동합니다. '일본제 운동화가 독일의 아디다스도 따라 잡을 수 있겠구나' 생각합니다.

(아디다스는 1949년 독일에서 처음 만들어졌고 나이키는 1964년에 창립되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디다스의 위상은 지금의 나이키와 비슷했습니다. )

일본으로 건너 간 필 나이트는 오니츠카 타이거, 그러니까 아식스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아식스와 계약을 맺어 미국에서 판매할 수 있게 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회사 이름은 나이키가 아니었고 'BLUE RIBBON SPORTS'였다고 합니다.

('BLUE RIBBON SPORTS'라고 하게 된 이유는 중거리 육상 선수 출신이었던 필 나이트가 대학생 때 무작정 일본을 찾아갔는데, 아식스 측에서 회사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막상 회사 이름이 없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육상에서 좋은 성적을 내면 파란색 리본을 줬었는데 그걸 회사 이름이라고 말하게 된 것입니다.)

1456.PNG 나이키의 주소가 쓰여 있는 나이키 에어조던 오프화이트 콜라보 제품

필 나이트는 일본에서 신발이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스승이자, 오리건 대학교의 육상 코치로 있던 빌 바우먼 코치에게 보냅니다. 빌 바우먼의 관심은 육상 기록에 있었습니다. '신발이 가볍고 좋으면 기록이 더 좋아지지 않을까?' 그는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신발 개조도 직접 했습니다. 그때, 아식스의 신발을 좋게 평가한 빌 바우먼도 함께 사업에 참여하게 됩니다.

처음 시작은 매장이 아니라 본인 집 지하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대회가 열리면 직접 찾아가고, 전단지를 돌리면서 홍보했습니다. 함께 사업을 시작한 빌 바우먼은 신발 연구에 대한 결과를 아식스에게 보내고, 아식스는 이를 받아들여 신발에 적용했습니다. 그 결과 신발은 아주 잘 팔려서 매년 높은 성장을 기록 했습니다.


2. 나이키의 탄생, 필 나이트의 촉

사업이 계속해서 성공하지만, 성공의 이면에는 시기와 질투가 있었습니다. 아식스가 계약을 전면 철회한 것이었습니다. 이때 필 나이트는 독자적 브랜드를 만들어 판매하기로 결심합니다.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바로 브랜드 로고입니다. 당시에 너무나 가난했던 필 나이트는 학교에서 만난 한 가난한 예술가, 캐럴린 데이비슨에게 로고 디자인을 부탁합니다. 시간당 2달러, 그리고 지금의 나이키 로고는 35달러에 탄생했습니다. 웃기게도, 필 나이트는 예측을 정말 못 했습니다. 처음에 나이키라는 이름과 로고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본인이 의도했던 이름은 'DIMENSION6', 'Falcon'이었습니다. 하지만 공장에서 신발을 찍어 내야 해서 확신이 없는 상태로 지금의 나이키와 로고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3. 비상하는 나이키

나이키는 처음에 축구화도 만들어 판매하고, 빌 바우먼 코치의 계속되는 신발 연구를 담은 신발을 판매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와플 기계를 보고 빌 바우먼은 생각합니다. '저 와플 기계로 찍어낸 것을 신발 밑창으로 만들면 어떨까?' 그렇게 지금도 너무 유명한 나이키의 와플 밑창이 탄생하게 됩니다. 아식스와 결별을 한 나이키는 시카고 박람회에서 와플 밑창과 나이키 로고를 단 신발을 판매하게 됩니다.

1515112313123.PNG 나이키 최초의 운동화, 코르테즈

필 나이트는 처음에 운동화가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하지만 실제 고객의 반응은 정반대였고 주문은 엄청났습니다.


4. '당신은 규칙을 깬 사람으로 기억 되어야 한다.'

필 나이트는 맥아더 장군의 말을 좋아했습니다. 여기서 필 나이트의 마케팅이 빛을 발휘합니다. 스타와 대학 육상팀에 나이키 제품을 협찬했습니다. 세간에는 나이키의 이러한 행보를 논란거리로 보았습니다. 그렇게 나이키는 이전에 없던 방식으로 자신들을 세상에 알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프랭크 루디라는 항공우주항공학자가 에어 쿠션을 들고 필 나이트를 찾아 옵니다. 지금은 당연하지만 그 당시에 쿠션을 신발 밑창에 다는 것은 정말 생소했습니다. 필 나이트는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프랭크 루디는 이미 아디다스에서도 거절 당했다고 말하죠. 그 말을 들은 필 나이트는 직접 착용해봤는데 생각보다 괜찮다고 느꼈습니다. 그렇게 '나이키 에어'가 탄생합니다. 처음부터 스포츠 스타들을 위해 신발을 만든 나이키였지만, 나이키의 디자인을 마음에 들어한 일반인들이 점차 나이키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5. 나이키의 점프

151651222.PNG 마이클 조던

스타 마케팅으로 입지를 넓혀간 나이키의 실질적인 성공은 한 사람을 만난 것으로 시작합니다. 아직까지도 스포츠계의 전설로 남은 인물, '마이클 조던'입니다. 아직 프로에 데뷔하지도 않은 나이키는 마이클 조던과 5년 계약을 맺습니다. 이때 NBA의 규정에는 흰색 운동화만 신어야 한다는 것이 있었습니다. 나이키는 빨간색과 검정색 조합의 운동화를 조던에게 주었고 그 벌금마저도 다 내준다고 했습니다. (조던은 실제로 아디다스를 더 좋아했었습니다.) 마이클 조던을 잘 알아봤던 걸까요. 마이클 조던은 소위 말해 NBA를 씹어 먹었습니다. 마이클 조던의 활약으로 나이키는 엄청난 성장을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6. 나이키의 방심

스타 마케팅으로 보통 사람들의 니즈를 충족한 나이키의 1위 수성에도 잠깐 주춤이 있었습니다. 아디다스였을까요? 아식스 때문이었을까요? 아닙니다. 리복이었습니다. 일반인들의 큰 호응을 얻어 아디다스를 무너뜨린 나이키가 이번에는 일반인들의 니즈를 무시했습니다. 당시에 에어로빅이 큰 인기를 끌었으나, 나이키는 에어로빅이 무슨 스포츠냐면서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이때 에어로빅의 인기를 잘 반영한 리복이 나이키의 독주 체제를 무너뜨립니다. 또한 해외 공장에서의 근무 여건 문제가 제기 되면서 나이키의 성장 속도가 더뎌지게 됩니다.


7. 나이키의 반성

지금은 해외 공장의 근무 여건도 개선하고 친환경 제품도 생산하고 있습니다. 또한 일반인들의 니즈를 충족하기 위해 다양성을 존중하는 광고들도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전에 있었던 방심의 원인들을 모두 잡아내는 결과였습니다.

나이키는 지금도 스타 마케팅에 이어서 슬로건 마케팅, 다양성 존중 등을 통해 좋은 광고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이는 일반 소비자에게 좋은 영향을 주어 나이키의 독주 체제가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또한 최근에는 리셀의 문제도 해결하고 있습니다. 한정판 스니커즈를 통해 브랜드의 가치를 높이고 있지만 한 사람이 여러 개의 계정을 통해 응모해 진짜로 갖고 싶어 하는 일반 소비자가 갖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발생했었습니다. 이에 따른 대응을 보여주며 정말로 스니커즈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 기회를 돌려주고 있죠. 나이키는 문제가 발생하면 피하지 않고 정면 돌파하며 해결책을 강구합니다. 최근에는 서서히 아디다스가 패션계의 주류로 자리잡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아무래도 계속 똑같이 생산되는 범고래 덩크, 에어 조던 색깔 놀이에 따른 질타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결국 나이키는 또 다른 돌파구를 찾아 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늘 그래왔듯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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