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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POSSIBLE IS NOTHING, ADIDAS

by 찰스킴

1. Adidas의 시작

아돌프 다슬러가 독일에서 창업한 브랜드가 아디다스입니다. 줄여서 '아디다슬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아돌프 다슬러는 독일의 '헤르초게나우라흐' 라는 지역에서 신발을 만들고 수선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지역은 이미 신발을 만들고 수선하는 것으로 유명한 동네였습니다. 아돌프 다슬러 또한 역시 신발을 만들고 수선하는 제화공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돌프 다슬러에게 제과제빵을 권유 했으나, 운동을 너무나도 사랑한 아돌프 다슬러는 육상과 축구를 위한 운동화를 만들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던 중 형인 루돌프 다슬러와 함께 신발 사업을 시작하게 됩니다. 아돌프 다슬러는 신발을 만드는 것에 집중했던 반면, 루돌프 다슬러는 사람들과 만나 영업하고 이야기 하는 것을 주로 맡았습니다. 그렇게 처음 지어진 아디다스의 이름은 '다슬러 형제의 운동화 공장'이었습니다.

14122.PNG 아디다스의 전신, 다슬러 형제의 운동화 공장

다슬러 형제의 운동화는 스포츠 종목 마다 맞춤형이었고, 훨씬 가벼웠기 때문에 인기가 많았습니다.


2. 다슬러 형제의 마케팅, 다슬러의 신념

다슬러 형제 또한 스타 마케팅이 홍보에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성적을 잘 내거나, 유명한 선수가 신을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다슬러 형제의 신발을 신은 선수가 올림픽 금메달을 땄습니다. 선수들 사이에서 다슬러 형제의 신발이 인정 받기 시작합니다.

아디다스는 정말 오래 전부터 있었습니다. 1924년부터 다슬러 형제의 운동화 공장이 운영되었으니까요. 다슬러 형제의 스타 마케팅에 대한 큰 효과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시작됩니다. 당시에 히틀러가 아리아인의 우수성을 보여주기 위해 스포츠를 강조했습니다. 이때 독일 선수단은 모두 다슬러 형제의 운동화를 신고 대회에 참가했고 실제로 대회 종합 1등을 달성합니다. 하지만 언더독의 반란은 늘 세간의 주목을 받습니다. 이 대회에서 탄생한 최고의 스타는 미국의 '제시 오언스'였습니다. 흑인이었죠. 워낙 옛날이었기에 인종차별이 심했습니다. 그래서 흑인에게는 신발 조차 후원되지 않았습니다.

이때 아돌프 다슬러는 제시 오언스를 찾아가서 운동화를 보여주며 후원을 약속했습니다. 그렇게 제시 오언스는 다슬러 형제의 신발을 신고 '100M 달리기', '200M 달리기', '400M 계주', '멀리뛰기'까지 4관왕을 달성합니다. 그렇게 다슬러 형제의 신발은 전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합니다.


3. 기사회생

이 시기는 다슬러 형제에서 혼란 그 자체였습니다.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했으나, 앞서 언급했던대로 히틀러와 동시대를 살았던 다슬러 형제 또한 그 영향을 받았습니다. 두 형제 모두 나치당에 가입 했었고 전쟁이 발발하여 모든 공장은 군수 물자를 위한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독일은 패배했지만, 나치에 협력한 다슬러 형제의 과거가 밝혀지면서 공장은 없어질 위기에 놓였습니다.

사람들의 반대를 무릎쓰고 미국의 '제시 오언스'를 후원했던 것을 기억하시나요? 전쟁을 승리로 이끈 미국의 몇몇 장교가 제시 오언스 일화를 알고 있었습니다. 공장은 없어질 뻔 했지만 그 신발의 우수성을 알고 있던 미국 장교가 선처하여 겨우 신발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4. 형제의 난, 탄생한 두 브랜드

저는 개인적으로 사업은 가족과 함께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을 하다보면 결국 싸우기 때문입니다. 물론 잘 이겨내는 가족도 많겠지만요. 전쟁 이후로 다슬러 형제는 공장은 지켜냈지만 둘의 연은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나치당의 지지 정도, 아내와의 바람 등 결별 원인에 대한 가설은 많았지만 명확한 팩트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1948년 둘은 홀로 서기를 시작합니다. 동생 아돌프 다슬러는 자기 이름에서 따온 '아디다스'를 만들었습니다. 형은 루돌프 다슬러를 줄여서 '루다' 라고 하려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푸마'로 바꿨다고 합니다.


5. 웅크렸던 아디다스의 도약

1954년 스위스 월드컵이 개최됩니다. 그동안 독일은 전쟁으로 인해 참여를 못 하다가 처음으로 참가할 수 있게된 월드컵이었습니다. 당시 서독의 결승 상대는 헝가리였습니다. 서독은 0대2로 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아디다스의 축구화가 기가막힌 활약을 합니다. 경기 전날 비가 많이 와서 운동장이 진흙이 되어 있었는데 이것을 간파한 아돌프 다슬러는 서독에게 긴 스터드로 교체하라고 합니다. 스터드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축구화 '뽕'입니다. 아디다스의 축구화는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신었던 영국산 축구화와 다른 점이 2가지 있었습니다. 축구화 스터드를 교체할 수 있었고, 발목까지만 올라오는 축구화였습니다. 영국산은 스터드 교체가 어려웠고 부츠형이었습니다.

비가 오고 진흙이 계속해서 묻자, 영국산 부츠형 축구화는 더 무거워졌습니다. 아디다스의 축구화는 스터드도 긴 것으로 교체할 수 있어 진흙에서의 활동성이 달랐습니다. 그렇게 서독은 3대2로 헝가리를 역전하고 우승합니다. 이때 아디다스의 명성은 전 세계의 인정을 받게 됩니다.


6. 선수의 니즈를 읽는 아디다스

슬리퍼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이 있나요? 학창시절 적어도 3개 이상은 사봤던 '삼선 슬리퍼'가 있을 겁니다. 삼선 슬리퍼는 선수들의 니즈를 잘 반영한 아디다스의 대표작입니다. 슬리퍼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그 옛날 선수들이 훈련 끝나고 샤워 후 물에 젖은 채로 신고 돌아다닐 수 있는 신발이 필요하다며 만들어진 게 지금의 삼선 슬리퍼입니다.

아디다스 하면 생각나는 것이 무엇이 있나요? 저는 삼선이 들어간 트랙 슈트가 생각납니다. 이 또한 선수들이 워밍업 할 때 입을 수 있도록 제작된 의류입니다. 그렇게 아디다스의 흥행은 축구, 월드컵과 이어져 계속 되고 있었습니다.


7. 아디다스의 경쟁자, 나이키? NO! 푸마

151222.PNG 1970년 멕시코 월드컵 공인구 '텔스타'

아디다스의 흥행에 번번히 저지를 놓은 것은 나이키가 아니라 형 루돌프 다슬러의 브랜드 푸마였습니다. 이러한 운동화 전쟁은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폭발합니다. 이때의 공인구는 아디다스의 '텔스타'였습니다. 아이러니할 수 있습니다. 월드컵이 지나고 나면 축구공은 생각보다 오래 기억에 가지 않습니다. 월드컵 스타만 뇌리에 박힐 뿐이죠. 그나마 축구공이 오래 노출 되는 때는 경기가 시작 될 때입니다.

푸마는 이 때를 기다렸습니다.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물론, 저주로 잘 알려진 축구황제 펠레를 푸마가 후원했습니다. 브라질과 페루가 8강전을 시작하는 그 때, 펠레가 심판한테 잠깐 멈춰 달라고 말합니다. 그러더니 그 자리에서 신발 끈을 천천히 묶습니다.

151512222.PNG 경기 시작 전, 갑자기 신발 끈을 묶는 펠레

공인구가 비춰져야 하는 때에 세계 최고 축구스타의 발에 전 세계의 시선이 모입니다. 브라질은 이때 우승까지 하며 펠레의 푸마 축구화가 계속해서 비춰졌습니다. 아디다스는 푸마에게 한 방 먹었습니다. 월드컵이 끝나고 사람들의 기억에 남은 것은 우승한 펠레의 축구화가 무엇이었느냐 였으니까요.


8. 건재한 아디다스의 위용

이때부터 운동화 전쟁이 가속화되었습니다. 스타 마케팅을 통해서 홍보를 제대로 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이 업계에서 아디다스의 위용은 놀라웠습니다. 정상을 밟는 선수의 모든 순간에 아디다스가 함께 있었습니다. 이때 나왔던 제품들이 우리가 요즘 알고 있으며 신고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1512111111111111.PNG 미국의 테니스 선수인 스탠리 로저 스미스

미국 최고의 테니스 선수였던 스탠리 로저 스미스의 이름을 따서 만든 아디다스의 '스탠스미스'가 탄생하였습니다.

55555555555555.PNG 카림 압둘 자바가 신고 있는 슈퍼스타

'슈퍼스타'는 최초로 가죽으로 만들어진 농구화였으며 선수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더 가벼워진 성능을 자랑하였습니다.


9. 아돌프 다슬러의 죽음

1978년 아돌프 다슬러가 세상을 등졌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호르스트 다슬러가 아디다스를 이어 받았습니다. 하지만 호르스트 다슬러는 운동화 전쟁을 더 키웠습니다. 아돌프 다슬러가 살아 있을 때부터 호르스트 다슬러는 아버지와 많이 싸웠습니다. 살아 생전에 아디다스를 마음대로 못 하자 그는 수영 브랜드, 아레나를 만들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우리가 수영복 하면 떠올리는 그 브랜드 아레나가 맞습니다.

호르스트 다슬러는 올림픽 위원회 IOC와 FIFA를 설득하여 기업이 올림픽과 월드컵에 후원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합니다. 그때까지 가장 큰 스포츠 브랜드가 아디다스 였기 때문에 국제 대회에서 아디다스가 주류였습니다.


10. 국제는 아디다스, 미국은?

국제 대회에서 아디다스가 주류를 이루었지만 미국 시장만은 달랐습니다. 미국 시장은 아디다스의 진출이 어려웠는데 그 이유가 '나이키'였습니다. 아디다스는 미국 시장에서의 영향이 덜하다는 것을 아디다스의 장점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어리석은 판단이었습니다. 시장이 가장 큰 미국의 영향력은 아직 성장중인 일본, 그 외 미국의 영향을 받는 다른 나라에 뻗어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영향을 받았기에 아디다스의 진출이 점차 어려웠습니다. 새로운 시장 개척이 어렵게 된 상황이었죠.

또한 아디다스는 무조건적으로 스포츠에만 집중했습니다. 운동, 스포츠 그게 아디다스의 정체성이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신발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는 '보통 사람들'에도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디다스는 한 우물만 팠지만 트렌드는 읽지 못했던 것이었죠. 그렇게 아디다스는 나이키, 리복에게 선두자리를 빼앗깁니다.


11. 아디다스의 위기, 새로운 CEO의 등장

호르스트 다슬러의 죽음으로 아디다스의 가족 경영은 끝이 납니다. 그리고 '로버트 루이드레퓌스'라는 CEO가 아디다스를 맡습니다. 로버트는 도전을 좋아했습니다. 로버트의 리더십을 바탕으로 미국 시장을 노립니다.

그의 첫 행보는 미국의 야구였습니다. 가장 큰 팀인 뉴욕 양키스와 스폰서십을 체결합니다. 또한 미식 축구 NFL과도 손을 잡으려 하고, 미국 대학팀에까지 손을 뻗습니다. 마케팅 비용을 늘리고 젊은 층의 스포츠를 공략하고자 했습니다. 성과는 좋았습니다. 여기에 힙합 씬에서 아디다스의 트랙 슈트를 입자, 의류 판매도 늘었습니다. 그렇게 한 때 1위를 빼앗은 리복을 아디다스가 인수하기까지 합니다. 아디다스의 위기 극복의 키는 늘 축구에 있었습니다. 축구에 공격적으로 마케팅을 했던 아디다스였고 축구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빅클럽의 스포츠 후원팀은 여전히 아디다스 입니다. 그렇게 아디다스는 클래식은 유지한 채 많은 변화를 이끌며 아직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사랑 받고 있습니다.


12. 원조였던 2위의 반란

스포츠 브랜드라는 것의 탄생을 알렸던 것은 아디다스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현재도 많은 스포츠 팀에 여러 브랜드가 경쟁을 하는 것은 모두 아디다스가 마련한 유산이라고도 생각합니다.

나이키는 스포츠 브랜드하면 가장 떠오르는 브랜드이지만, 아직까지도 굵직굵직한 국제 스포츠 대회의 공식 후원사는 아디다스입니다. 여전히 공인구도 아디다스가 만들고 있죠. 그만큼 아디다스가 쌓아온 명성과 그 클래식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찾는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발에서만 봐도 그렇습니다. 나이키의 에어 조던, 덩크, 오프화이트 콜라보레이션은 반짝 뜨고 지고를 반복합니다. 하지만 아디다스의 클래식은 폭발적이지는 않지만 늘 사랑받습니다. 슈퍼스타, 스탠스미스, 가젤, 삼바가 있죠. 사람들은 점차 나이키의 반복되는 색깔 놀이에 지쳐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너무나도 트렌디하여 빠르게 소비되는 이러한 색깔 놀이에 지친 사람들의 눈길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한결 같이 존재하는 아디다스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니즈를 반영한 아디다스 또한 그 자리에만 머무르지 않고 트렌드를 반영하기 위해 구찌, 웨일즈 보너 등과 콜라보레이션으로 응답하고 있습니다.

'폼은 일시적이지만 클래스는 영원하다' 축구계의 명언입니다. 축구를 통해 성장하고, 축구를 통해 위기를 극복한 아디다스는 이 명언과 많이 닮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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