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너머의 책임
3화.
혼란의 시작
하람과 헤어진 뒤,
서연은 다시 카페로 돌아오지 않았다. 커피는 반쯤 비어 있었고, 빨대의 맑은 원형 자국이 유리컵에 남아 있었다.
그녀는 골목을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발밑에서 벗겨지는 물기와 먼지, 가게의 환풍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덥고 무거운 바람, 토스트 빵이 타기 직전의 갈색 냄새, 마네킹이 입은 웨딩드레스의 레이스에 매달린 먼지 입자의 모세 형상까지, 모든 것이 유난히 선명했다.
선명하다는 건 때로는 무서운 일이다.
선명한 사물은 나를 선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 선명함의 칼끝이 자신의 피부를 얇게 긁고 지나가는 것과 같은 느낌을 느꼈다.
회사에 도착했을 때,
엘리베이터 거울 속의 자신이 낯설었다. 거울은 늘 타인의 시선을 모사한다. 거울 속의 서연은 오늘따라 타인의 눈으로 바라보는 법을 이제 배운 초보자처럼 매우 낯설고 서툴러만 보였다. 오늘따라 거울에 비춰진 모습이 어리숙하고 부족하게만 보였다.
그녀는 혀끝으로 잇몸을 한번 훑었다.
다시 한번 아주 미세한 쇠맛이 입안에 올라왔다. 이 감각은 마치 철을 먹는 꿈을 꾸고 막 깨어난 아침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혹시 내가 조금씩 잘못되어가고 있는 걸까?’
그 생각이 생기자, 어긋남의 목록들이 꼬리를 물었다. 박사 과정을 그만둔 일, 결혼을 앞두고도 이유를 알 수 없이 속이 비워진 듯 허한 일, 그리고 요즘 들어 기도할 때 이전과 다른 침묵을 마주한다는 사실까지...
사무실 자리에 앉자마자 메일함이 터졌다.
탄소배출권 모니터링 보고서의 수정 요청, ESG 지표 설계 회의 일정 변경, 코로나 관련 현장 조사 연기 공문. 컴퓨터 모니터 화면은 숫자와 단어로 가득했지만, 그녀는 글자와 글자 사이를 메우고 있는 침묵의 감각에 더 먼저 닿아 있었다.
‘긴급’, ‘최대한’, ‘금일 내’, ‘재검토’
이 단어들이 모여 만드는 말하지 못한 문장.
“우리 모두는 불안하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그 문장을 손가락에 걸어 돌려 보기도 하고, 무게를 재듯 마음 위에 올려놓았다 내려보기도 했다. 그 무게는 종이 두께의 얇음을 하고 있으면서도, 기압의 변화처럼 사방에서 밀려오고 밀려나아갔다.
점심 무렵,
동료 두 사람이 복도 코너에서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소리가 스쳤다.
“요즘 분위기, 진짜… 인원 줄인대.”
“팀장도 위험한 거 아냐?”
그들의 입술은 조심스럽게 움직였지만,
서연의 귓속에는 말보다 먼저 감정의 잔향이 흘러 들어왔다. 그 잔향은 오래된 서랍에서 꺼낸 담요의 냄새처럼, 사람의 피부 사이사이에 달라붙었다. 질투와 불안, 그리고 작은 계산들까지.
그녀는 발걸음을 늦추었다.
문득, 자신의 이름이 속삭여지는 것을 들었다. 아니, 들었다고 믿는 편이 더 정확했다.
"서연은 괜찮겠지?"
그 말은 걱정의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걱정, 안도 그리고 희망이 번들거리는 표면을 갖고 있었다. 인간의 마음은 언제나 순수하지만은 않았다. 그래서 더 사랑스러우면서도 밉고, 미우면서도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복잡한 감정을 치우듯,
그녀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려고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서연은 알았다. 사랑스러움과 피곤함은 종종 같은 얼굴을 하고 다가온다는 것을...
그녀는 피곤한 얼굴을 거울에 비추었다.
그러나 그 얼굴은 피곤함과 동시에 어딘가 사랑스러워 보였다. 마치 두 개의 상반된 표정이 겹쳐진 듯했다. 사랑스러움과 피곤함은 종종 같은 얼굴을 하고 다가온다.
그리고 그 순간,
서연은 문득 알 수 없는 낯섦을 느꼈다. 이것이 사랑인지, 피곤인지, 혹은 다른 무언가인지 분간되지 않는 흐릿한 감정이 얼굴 위에 스며들며, 혼란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걸까?,
이 모호함이 나를 부서뜨릴지 아니면 지켜줄지조차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