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너머의 책임
2화.
감각의 문이 열리다
서울의 공기는 언제나 약간의 철 냄새를 품고 있었다. 새벽에 비가 스치듯 다녀간 다음 날이면 그 냄새는 더욱 선명해졌다.
지하철역에서 불어 올라오는 바람은 젖은 먼지와 커피 찌꺼기, 오래된 광고판의 비닐과 플라스틱 냄새를 뒤섞어 보냈고, 건물 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실외기의 뜨거운 숨결은 여름의 미련처럼 허공에 맴돌았다.
유서연은 그 공기를 천천히 들이마셨다.
단순한 숨이 아니라, 오래 굴러온 시간이 가루가 되어 잠시 흩날리는 것 같았다.
혀끝에 올려보면 짠맛도 쓴맛도 아닌, 금속성의 무표정한 맛이 스며들었다. 도시의 아침은 그렇게, 맛으로 시작되곤 했다.
회사로 향하기 전,
늘 들르는 작은 카페가 있었다. 문을 열자 케냐 AAA 원두를 갓 갈아낸 향이 서연의 코끝을 스쳤다. 그것은 단순한 커피 향이 아니라, 햇살 가득한 아프리카 초원에서 불어온 바람이 한 알의 열매 안에 고여 있다가 터져 나온 듯한 향이었다.
진득한 흙냄새와 구운 견과류의 고소함이 겹쳤고, 끝에는 검은 베리의 새콤한 결이 미세하게 파고들었다. 서연은 그 향을 들이마시는 순간, 몸 안쪽에서 잔잔하게 울리는 파동을 느꼈다.
마치 자신이 어떤 원초적 흙과 연결되어 있다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척이었다.
바리스타의 동작은 정확했고,
에스프레소 머신의 압력 게이지는 언제나 같은 각도를 가리켰다. 서연은 그 정확함이 주는 위안을 좋아했다. 예측 가능한 것은 마음을 가라앉혔고, 반복되는 리듬은 그녀에게 하루를 버틸 작은 질서를 주었다.
오늘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창가에 앉았다. 통유리 너머로 명동의 골목이 열렸다. 간판 불빛은 낮에도 희미하게 떨렸고, 버스 브레이크 패드는 아스팔트를 긁으며 낮은 비명을 흘렸다.
그 순간,
아주 가벼운 현기증처럼 그녀의 귓속 어딘가에서
‘딸깍’
하는 미묘한 울림이 스쳤다.
소리라기보다 소리 직전의 기척 같은 것이었다. 누군가의 숨결이 어깨에 닿은 듯 온기가 흘렀지만, 돌아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낯익은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젖은 흙,
잘린 민들레 줄기의 풋한 즙 내.
그 순간, 어린 시절 시골 운동장의 한낮이 통째로 밀려들어왔다. 축축한 흙바닥, 뻣뻣한 체육복, 그리고 손바닥 위에 자벌레를 올려놓고 웃던 소년의 얼굴.
‘하람…?’
이름이 망설임 끝에 혀끝 위에 떠올랐다. 졸업 이후 연락 한 번 없었던, 얼굴의 정확한 생김새보다 웃을 때의 구김살만 희미하게 남아 있던 소년.
휴대폰을 열어봤지만 연락처에는 없었다.
그녀는 무심코 메모장을 켜서 단어를 적어 내려갔다. 하람, 민들레, 자벌레, 흙냄새. 꼭 꿈에서 막 깨어나 잊지 않으려는 듯 단어들을 서연은 붙잡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바리스타가 잔을 밀어주며 웃었다. 얼음이 컵 안에서 자리를 잡아가며 맑게 울렸다. 서연은 빨대를 꽂아 첫 모금을 삼켰다. 차가운 액체가 목으로 떨어지는 순간, 방금의 울림이 커피와 함께 식도를 훑고 내려가는 듯 선명해졌다.
그녀는 무심히 창밖을 보다가,
사람들의 흐름 속에서 하나의 점에 시선이 멈췄다. 오래된 책갈피처럼 불쑥 튀어나와 손가락을 잡아끄는 얼굴.
하람이었다.
어린 시절의 소년은 사라지고, 길게 묶은 머리와 깊어진 눈매의 청년이 있었다. 하지만 고개를 기울이는 습관, 사람들 사이를 비켜 걷는 리듬, 오른쪽 어깨가 살짝 올라간 자세는 변하지 않았다.
서연은 문을 밀치고 뛰어나갔다. 아이스커피의 물방울이 손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람!”
그 이름을 부르는 순간, 가슴속에서 ‘딸깍’ 하는 소리가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확실한 소리였다.
하람이 돌아봤다.
눈이 마주쳤고, 짧은 정적이 골목의 소음을 지워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동시에 웃었다. 어색함과 놀라움, 그리고 오래된 시간의 문이 열리며 새어 들어오는 바람 같은 낯선 떨림.
“유… 유서연? 와... 진짜 오랜만이다!”
“어떻게… 여기서…”
서로의 안부는 표면을 스치듯 오갔지만,
서연은 말로 담기지 않는 다른 결들을 어렴풋이 느꼈다. 하람의 피곤한 숨, 막 타고 온 버스의 답답함, 잠시 취소해야 했던 약속의 흔적. 그리고... 아주 미세한 망설임.
'아니 왜? 오늘!.'
그는 속으로 그런 문장을 잠시 굴렸다가 금세 덮어두는 듯했다. 서연은 잠시 얼어붙었다. 그 감각이 착각일지, 아니면 정말 스쳐간 속내일지 알 수 없었다.
신호등이 바뀌자 행인들이 밀려왔다. 하람은 휴대폰을 꺼내며 말했다.
“나 지금 급하게 가야 해서… 번호 좀 남겨줄래?”
그녀가 번호를 입력하는 동안, 그의 뒷머리에서 약한 비 냄새가 흘러나왔다. 서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의 마음에 손을 넣어 모양을 바꾸는 일은, 무례할 뿐 아니라 위험하다는 본능적 감각이 혀끝을 눌렀다. 그래서 아무것도 물어보지 못하고 하람을 그렇게 보내줘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