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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당신의 모든 순간을 보고 있다

by 영업의신조이

17장.

실패의 밤과 부서진 거울 조각


마리는 그저 살아냈다.

더는 살아간다고 표현하기엔 삶이 너무 무거웠다. 상담실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수많은 내담자들의 고통을 마주하며, 마리는 자신의 고통을 밀어두었다. 밤이면 고요히 무너지면서도, 아침이면 다시 단정하게 머리를 말리고, 몸에 핏이 살아나는 네이비색 세미 정장을 착용한 채 출근했다.


그러기를 수십 번,

수백 번 반복한 끝에, 시간은 어느새 3년을 넘겼다. 무표정한 얼굴로 일정을 정리하고, 매뉴얼에 따라 감정을 배치하면서 마리는 점점 말라갔다. 자신이 상담하고 있는 그 어떤 내담자들보다도 마리 본인이 더 피폐해져 가는 아이러니한 삶이었다.


하지만 절대 놓을 수 없었다.

이 길을 위해 모든 시간을 바쳐왔고, 그걸 포기하는 건 곧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즈음,

엄마 윤서에게서 전화가 왔다. 평소와는 달리 숨이 가쁜 듯한 목소리였다.


“마리야, 아프지 마. 너무 무리하지도 말고... 직장이라는 건 너를 위한 장소가 되어야지, 직장을 위해 네가 그곳을 찾아가면 안 돼. 네가 될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해.”


“그리고 너무 무리하지 말아라, 아가.”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울먹였다.


마리는 화가 났다.

엄마의 숨 가쁜 숨소리도, 아직도 자신을 ‘아가’라고 부르는 엄마도 싫었다. 긴 침묵 끝에, 둘은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며칠 뒤,

아빠 지훈이 서울로 올라왔다. 마지막 통화 이후 윤서가 마리를 너무 걱정했기에, 지훈은 딸의 모습을 직접 확인하러 올라온 것이었다.


검은 바람막이를 입고,

손에는 작은 보온병을 든 채 그는 딸을 만났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마리를 품에 안았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는 말했다.


“엄마랑 아빠는... 우리 딸이 너무 힘들어하는 걸 보고 싶지 않단다. 너무 힘들면, 언제든지 엄마 아빠에게 돌아오렴.”


하지만 마리는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

눈물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끝내 흘리지 않았다. 오히려 짜증을 내며 아빠를 향해 쏘아붙였다.


“나는 혼자서도 잘 살 거예요. 저 좀 그냥 내버려 두세요, 네? 아빠, 제발요.”


마음속에서 일렁이기만 하고 끝내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들......


‘아빠, 나 너무 힘들어.’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

‘아빠, 미안해.’


말하고 싶었지만,

더 말라가는 아빠의 얼굴을 보자 도리어 화가 치밀었고, 결국 맘에도 없는 말을 내뱉고 말았다. 그 말이 아버지의 가슴을 찢는 칼이 될 줄도 모르고...


그 후,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윤서는 코로나 후유증으로 인한 악성 폐렴으로 지훈 곁을 떠났다. 그녀는 죽는 순간까지도 딸 마리를 걱정하며 눈을 감았다.


“마리야, 너무 무리하지 마.”


그 메모 한 장만을 남기고, 그렇게 하늘나라로 떠나버렸다.


장례식 첫날,

마리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마신 모든 물을 두 눈과 가슴 그리고 온몸으로 쏟아냈다. 그 눈물은 장례식장을 연못처럼 적셨다.


장례 마지막 날,

단 한순간도 윤서의 영정 사진 곁을 떠나지 않았던 지훈은 무릎을 꿇은 채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마리의 부름에도 그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런 흔들림도 없이, 그는 고요한 침묵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


지훈의 삶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마리는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못했다.

눈물이 아니라, 숨이 멎었다. 아빠는 그렇게, 딸을 홀로 남겨두고 윤서에게 가버렸다. 윤서의 사진을 품에 안고, 작은 미소를 지으며 영원한 잠에 들었다.


그날 밤,

아무도 울지 않았다. 그 어떤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리는 더는 떨어질 수조차 없는 바닥까지 내려앉고 말았다.


그녀는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했고, 극심한 두통과 피로에 시달렸다.


그렇게 3개월이 흘렀다.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마리는 극심한 어지럼증과 함께 코피를 쏟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어느 손에 이끌렸는지도 모르게, 그녀는 병원 응급실에 누워 있었다.


며칠 뒤,

의사의 입에서 태어나 처음 듣는 단어를 두 귀로 듣게 되었다. 마리는 왼쪽 유방에 암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가슴 절제 수술을 서둘러야 한다는 통보였다.

마리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반복해서 끄덕였다.


수술이 끝난 병실,

창가에는 희끄무레한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퇴원하는 날, 입고 왔던 정장을 조심스레 꺼내 들었다.

가슴 쪽에는 아직도 그날의 코피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일어나 정장을 반듯하게 입으려 애썼다.


거울 앞에 섰다.

상체는 평평했고,

그 위에 보정 브라를 걸쳤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구입한 이 인조 곡선은,

그녀를 사회적으로 ‘정상’처럼 보이게 하는 마지막 방패였다. 애써 울음을 참으며 브라를 정돈하던 손끝이 점점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다음 날,

집으로 돌아온 첫 아침이었다. 샤워기 아래서 그녀는 흐느꼈다. 거울 속에는 아무것도 없는 평평한 가슴,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숨을 참고 있는 마리가 있었다.

손끝으로 자신의 가슴선을 더듬던 그녀는 고개를 떨구며 감정을 터뜨렸다.


주먹은 거울을 향했고,

감정은 쓰나미처럼 솟구쳤다.


“엄마, 아빠… 너무 미안해.”


“내가 너무 잘못됐어…”


거울은 산산조각 났고,

조각 속에는 울고 있는 마리의 얼굴이 천 개의 파편으로 흩어져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깨진 유리 조각 하나가 무릎에 박혀 붉은 피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그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엄마, 아빠를 잃은 슬픔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한 채......”


“나는 오늘도 회사에 나가기 위해……”


“인조의 브라를 집어 들고 있어!!!”


“나, 정말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거야?”


“엄마!!! 아빠!!! 나 이제 어떻게 살아!!!”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붉게 물든 욕실 바닥에서 자신의 핏물과 눈물을 하루 종일 조용히 껴안고 누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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