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가지 태도
12화.
인생의 문 _ 다섯 가지 태도
세상에는 늘 많은 문들이 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는 내내 수많은 문 앞에 선다. 어떤 문은 스스로 열리고, 어떤 문은 굳게 닫혀 있다. 어떤 문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어떤 문은 조용히 잊힌 채 서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말이 많은 문 앞에 먼저 줄을 선다. 그 문은 늘 시끄럽고 분주하다. 말들이 서로를 덮고, 견해들이 충돌하며, 의견들은 설득보다 선동에 가까운 에너지로 부풀어 오른다. 그 안에서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결국 다른 이의 침묵을 밀어낸다.
우리는 그 문이 정답에 가까울 거라 착각한다.
사람이 많고, 말이 많은 곳이 옳은 자리일 것 같아 안심한다. 다수가 선택한 줄이 진실에 더 가깝다고 믿고, 소란이 곧 진심의 증거일 거라 기대한다. 그러나 그 문 앞에는 진실이 없다. 왜냐하면 진실은 언제나 조용하기 때문이다. 애써 해명하지 않고, 힘써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따지듯 묻지 않으면 즉각적으로 대답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진실은 오늘도 줄 밖에서 조용히 앉아 있다. 누군가가 알아봐 주지 않아도, 다만 존재하는 방식으로 그 자리를 지킨다. 이것이 첫 번째 태도, 비난과 확신의 언어 속에서 진실을 놓치는 인간의 습관이다.
두 번째 문 앞에는 반쯤 돌아선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들은 서로의 옆과 뒤를 바라본다. 그 시선은 곧, 그들이 기준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자기 자신을 보기보다는, 굳이 애써 타인을 바라본다. 남이 어떻게 하는지를 살피고, 거기에 따라 자신의 속도와 방향을 조절하려 애쓴다.
타인의 기준으로 자신을 측정하고, 남의 시선에 기대어 스스로의 윤곽을 그린다. 끊임없이 구분하고 비교하며 사는 이들은, 무엇이 좋고 나쁜지를 남이 정해주는 구조 속에서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완전히 잃어버린다. 자기 응시 없이 사는 이들은 불안에 민감하고, 자기 내면을 돌아보기보다는 타인의 감탄이나 인정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틴다. 마치 메마른 토양이 인정의 봄비를 기다리듯, 남의 평가만 바라보며 자신을 겨우 유지한다.
결국 누군가의 그림자에 얽혀 살다 보면, 자신은 어디에 있었는지도 알 수 없게 된다. 이들은 존재를 빌려 쓰며, 타인의 욕망을 입은 채 살아간다. 그러다 보니 욕망에 다다르지 못하는 환경을 탓하고, 남을 비난하고 원망하며 험담하게 된다. 이것이 두 번째 태도, 자기 부재 속에서 타인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방식이다.
세 번째 문은 멀찍이 떨어진 사람들의 박수 소리로 채워져 있다.
그들은 응원한다.
지지한다.
격려한다.
그러나 손은 언제나 깨끗하고, 무릎은 한 번도 굽혀진 적이 없다. 그들의 말은 따뜻하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상대에게 진심으로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다. 고개를 끄덕이되, 책임은 지지 않는다. 그들의 말은 언제나 안전하다. 책임지지 않는 거리에서 던지는 말은 언제나 그렇게 쉽게 전달된다. 그러나 말은 다정해도, 참여하지 않은 공감은 그저 풍문일 뿐이다. 박수는 위로가 될 수 있지만, 진정한 삶을 지탱하지는 못한다.
누군가를 위해 무릎을 굽혀본 적이 없다면, 우리는 그를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은 고통을 위로하지만, 고통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곁에 머무르되, 진심으로 곁을 나누지는 않는다. 응원의 거리에는 한계가 있고, 그 한계는 때때로 침묵보다 차갑다. 이것이 세 번째 태도, 책임 없는 다정함의 공허함이다.
네 번째 문은 고요한 침묵 속에서 조용히 열린다.
문을 여는 사람은 말이 없다. 한 사람이 묵묵히 다가가 문을 열고, 불안한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그는 말하지 않고, 대신 무언가를 들고 나온다. 땀이 묻은 손끝에는 무겁고 투명한 흔적이 남아 있다.
그 흔적은 말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몸으로 감당해 낸 결정이고, 마음으로 통과해 낸 삶의 무게다. 그는 스스로를 남에게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 얼마나 오래, 조용히 홀로 자신의 길을 견뎌왔는지를...
고요 속에 감춰진 무게는 늘 크고 단단하다. 그들의 삶은 빛나지 않지만, 흔들리지 않는다. 실천은 침묵보다 강하고, 설명보다 분명하다. 이것이 네 번째 태도, 행위로 말하는 사람들의 윤리적 자세다.
마지막,
다섯 번째 문은 기울어져 있고, 그 앞에는 한 사람이 문턱에 등을 걸친 채 앉아 있다. 그는 문이 닫히지 않도록 자신의 등을 문에 기대고 있다. 그 사람은 줄에 서지 않았다. 누구보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누구보다 조용히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다.
누군가가 문을 지나갈 수 있도록, 자신을 문으로 내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통과하지 않는다. 그는 지나가지 않는다. 그는 그저, 열려 있는 채 존재한다. 아무도 보지 않지만, 누구 하나 칭찬이나 인정을 해주지 않지만, 그는 누군가의 길을 지금도 열어주고 있다. 말도 없고 박수도 없다.
하지만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다. 그는 입구도 아니고, 출구도 아니다. 그는 경계 그 자체다. 그 자리에 등을 걸치고 있는 것은 단지 희생이 아니라, 삶의 결심이다. 이것이 다섯 번째 태도, 자신을 다리로 내어주는 이들의 삶의 방식이다.
오늘,
나는 문 앞에 서 있다.
나는 지금, 줄 앞에 서 있다.
나 역시 오늘 그리고 지금, 어느 줄에 서 있는가.
나는 지금 어떤 문 앞에 서 있는가.
그리고 내일, 나는 어느 문 앞에 닿게 될까.
이 질문은 무겁지도, 강요하지도 않지만, 결코 피할 수 없다. 정답은 없다. 다만 질문만 내 안에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 질문을 등에 지고 또 다른 하루를 산다. 때때로 우리는 그 질문을 잊고 살지만, 어떤 장면 앞에서, 어떤 문 앞에서, 그 질문은 다시 돌아온다. 다시 내게 묻는다. 지금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나는 말 대신 발걸음으로 말하겠다는 다짐을 단단히 해본다. 말로만 지지하지 않고, 박수 소리로만 응원하지 않으며, 발로 직접 걸어 나가겠다. 누군가의 손등 위에 따뜻한 햇살 하나를 올려주겠다는 그 다정한 다짐은, 삶을 선택하는 방식에 대해 다시 내게 묻는다.
햇살 하나를 얹는다는 건, 누군가의 삶에 따뜻한 흔적 하나를 남긴다는 뜻이다. 그것은 거창한 구원이 아니라, 작고 구체적인 연대다. 함께 걷겠다는 의지이고, 무릎을 굽히겠다는 결심이며, 나도 그 자리에 있겠다는 고백이다.
이제는 줄에 서지 않겠다.
말 많은 문 앞에서 떠드는 무리에 기대지 않겠다.
나 자신이 그 문이 되겠다.
문이 닫히지 않도록 내 등을 내어주고, 누군가가 이 문을 지나갈 수 있도록 내 몸을 기꺼이 내어주겠다.
판단하고 해석하는 입술보다, 문턱을 지탱하는 등이 되겠다.
그곳엔 기다리는 이가 있다.
그곳엔 다가오는 이도 있다.
언젠가 누군가가 나의 그 자리 덕분에 그 문을 지나간다면, 그것으로 나는 충분하다.
이제 함께 나아가자.
말하지 말고,
손을 잡고 걸어가자.
줄이 아니라,
우리가 문이 되자.
그것이
우리가 오늘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