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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 존재 관찰 일기

존재와 존재가 만나 하나의 울림을 만들다

by 영업의신조이

1화.

바람과 공의 노래

"존재는 서로의 빈틈에서 울린다"



‘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순간 이미 그것은 무가 아니게 된다.


말이라는 언어 형식 속에 붙잡히는 순간, 아무것도 없던 결은 언어의 등불 아래 하나의 유처럼 모습을 드러낸다. 없음을 대상으로 만드는 이 역설은 오래전부터 존재를 묻는 질문을 흔들어 왔고, 우리는 그 흔들림 속에서 비로소 세계를 바라보게 되었다.


없음은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어떤 것이 드러나기 위해 먼저 준비되어야 하는 배경의 장이다. 빛이 드러나기 위해 어둠을 필요로 하듯, 있음이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언제나 그보다 먼저 숨을 고르는 없어짐의 자리가 있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이 없음이 우리가 외면하거나 두려워해야 할 공백이 아니라, 존재가 자신을 펼치기 위해 가장 먼저 의지하는 바탕이라는 사실이다.


무는 사라짐의 구덩이가 아니라 드러남의 바닥이며, 존재는 그 바닥을 통해 자신의 길을 열어간다.



커피잔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 사유는 선명해진다.


커피잔은 비어 있을 때 비로소 그 역할을 다한다. 비어 있음은 무력한 결핍이 아니라 무엇이든 담아낼 수 있는 가능성의 구조이며, 이미 가득 찬 잔은 더 이상 잔의 목적과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사람들은 사물의 바깥 형태를 보지만 그 존재적 기능을 완성하는 것은 형태가 아니라, 그 형태 안의 비어 있는 자리이다. 마음이 가득 차 있으면 새 감정이 들어오지 못하고, 사고가 선입견으로 굳어 있으면 새로운 이해는 들어가지도 통과하지 도 못한다.


비어 있다는 것은 수동적 허무가 아니라 받아들일 준비가 끝난 능동적 상태이며, 존재의 문이 조용히 열려 있는 순간이다. 의미는 채워진 것에서가 아니라 채워지기 전의 그 비워진 자리에서 시작된다.



갓 태어난 아이의 마음 역시 완전한 비움에서 출발한다.


그 마음에는 아직 어떤 판단도, 상처도, 결론도 없다. 그러나 바로 그 공백이 모든 유의 씨앗을 품고 있다. 부모의 목소리와 빛의 결, 계절의 냄새와 첫 감정의 떨림, 실패의 통증과 기쁨의 온기가 그 빈자리 위에 한 겹씩 쌓여 아이는 자신만의 감각과 기억, 사고와 정체성을 만들어낸다.


인간은 비어 있음에서 출발해 세계와 만나는 과정을 통해 채움을 배우고, 채워진 이후 다시 비워내며 또 다른 채움을 준비한다.


그래서 비움은 곧 열림이고, 열림은 존재를 이루는 첫 구조가 된다. 존재란 고립된 실체가 아니라 내부의 빈자리와 외부 세계가 끝없이 만나는 흐름 속에서 형성되는 움직임이다.



세계 인식 또한 보이지 않는 배경 위에서 작동한다.


우리가 공간을 이해할 때 사용하는 x, y, z 좌표는 만질 수도 볼 수도 없지만, 그 보이지 않는 좌표가 없으면 어떤 존재도 세계 안에 위치할 수 없다. 좌표는 비가시적이지만 존재가 자리를 가질 수 있게 하는 전제이다.


우리는 대상을 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먼저 열린 공간의 구조가 있기 때문에 그 보임이 가능해진다. 무는 그런 자리의 바닥, 즉 존재가 스스로를 드러내기 위해 의지하는 근원적 조건을 의미한다.



방의 벽에 난 창문도 같은 진실을 품는다.


창문은 채워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비워져 있기 위해 존재하는 틈이다. 그 비워진 공간을 통해 바람이 드나들고, 빛이 흘러들고, 계절의 색이 스며들고, 먼 곳의 풍경이 마음속으로 들어온다.


창이 막혀 있다면 방은 눈을 잃은 세계처럼 고립되고 만다. 창문은 결핍이 아니라 연결이며, 내부와 외부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감각의 다리이다.


방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넓어도 물건으로 가득 차 있으면 우리는 그 안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 침대가 놓이려면 바닥이 비어 있어야 하고, 사람이 머무르려면 여유 공간이라는 무가 필요하다. 비어 있는 방은 텅 빈 공간이 아니라 삶이 들어올 준비를 마친 완전한 틈이다.



창문과 방, 좌표와 커피잔, 아이의 마음과 인간의 사유는 모두 하나의 원리를 말한다.


무는 존재의 결핍이 아니라 능동적 가능성이다. 우리가 무라고 부르는 그 자리는 소멸의 구덩이가 아니라 새로운 의미가 태어나는 심연이며, 동양 사유가 말하는 공 또한 같은 진실을 이야기한다.


공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어떤 것도 고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것으로 향할 수 있는 열림의 자리이며, 고정되지 않았기에 자유롭고, 비어 있기에 스며들며, 형태가 없기에 어떤 형태도 될 수 있다.


무는 부정이 아니라 생성의 조건이며, 유는 그 조건 위에서 잠시 드러나는 형상의 존재적 한 순간이다.


그래서 무와 유는 서로의 그림자이면서 동시에 서로를 드러내는 두 개의 빛이다. 존재는 비어 있음에서 태어나고, 비어 있음은 존재 때문에 의미를 얻는다. 무는 유의 기반이며, 유는 무의 얼굴이다.



이 사유의 끝에서 나는 문득 하나의 장면을 떠올린다.


대기 중을 떠돌던 바람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늘 의심했다. 손으로 잡히지도 않고, 형태를 가질 수 없으며, 자신이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람은 자신보다 더 깊은 허무 속을 떠도는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의 이름은 공이었다. 공은 어디에나 있었지만 그래서 어디에도 없다고 느꼈다. 자신을 확인할 길이 없었고, 평생 무용하다고 여겨졌다.


그때 바람은 조용히 말했다.


“네가 느끼지 못했을 뿐, 너를 이루는 자리가 어딘가에 있을 거야.”


처음에는 아무것도 감지되지 않았지만 마음을 비우고 자신을 바라보자 공은 아주 미세한 감각을 느끼기 시작했다. 자신 안에 ‘구멍 같은 통로’가 있다는 사실을, 평생 쓸모없다고 여겼던 바로 그 빈자리. 그 틈을 감싸고 있는 대나무의 단단한 결을 깨닫는 순간 공은 자신이 허공이 아니라 대금의 내부를 이루는 공기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 깨달음이 가라앉기도 전에 바람은 공 안으로 스며들었다. 비어 있는 통로를 따라 흐르며 바람의 움직임과 공의 빈자리가 서로를 만나는 순간, 누구도 예견할 수 없었던 새로운 울림이 태어났다. 대금의 소리가 바로 그 틈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있음과 없음 사이의 공간에서 태어난 그 울림은 무와 유가 서로를 통과하며 만들어낸 고요한 증명 같았다.


바람과 공은 그제야 알았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비어 있다고 해서 무의미한 것이 아니며, 빈자리 속에서 서로가 길이 되어 흐르는 순간, 그 빈자리에서 음악이 태어난다는 사실을.


바람은 자신이 공을 필요로 했음을, 공은 자신이 비어 있었기에 바람을 받아들일 수 있었음을, 둘이 만나야만 노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없는 것처럼 보였던 두 존재가 서로를 통과하는 순간, 무는 더 이상 무가 아니었고 유는 고립된 유가 아니었다. 둘은 서로를 필요로 하는 하나의 호흡이었으며,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세계는 이전과 다른 결로 다가왔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고, 비어 있다고 해서 가치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서로의 빈자리에서 서로의 흐름이 건너갈 때 우리는 마침내 하나의 음악이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여정의 끝에서 조용히 남는 깨달음은 이것이다.


존재란 단단한 실체가 아니라 스스로를 드러내기 위해 기꺼이 자리를 비워주는 열림의 사건이며, 무는 결핍이 아니라 가능성이고, 유는 그 가능성이 한순간 형체를 얻은 모습이다.


삶은 그 두 호흡이 서로를 드러내며 이어지는 연속이고, 존재는 충만에서가 아니라 비워진 자리의 침묵에서 시작된다.


그 비워짐은 우리가 세계를 받아들이기 위해 처음부터 마련되어 있던 오래된 초대장이며, 우리가 그 초대장에 응답하는 순간 비로소 세계의 숨결이 우리 안에서 울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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