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머무는 자리

당신의 존재는 이미 아름답다

by 영업의신조이

17화.

Someday, Somewhere



설명이 필요 없는 날도 있습니다.


비가 내리는 퇴근길, 화려한 간판 불빛은 거리 위에 넘쳐나고, 분주한 걸음들이 서로를 스치며 흘러갑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이미 충분히 많은 말을 듣고 있습니다. 다만 그 소리들 사이에서, 정작 자신의 마음이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는 묻지 않은 채 하루를 끝냅니다.

그날의 저는 그 퇴근길 빗속에 서 있었습니다.

말없이, 얼어붙은 채로.



움직이고는 있었지만,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손끝에서 무엇인가 흘러내리고 있다는 감각이 늦게 찾아왔습니다. 우산 없이 비를 맞으며, 떨어지는 빗줄기를 가운데 손가락 위로 그대로 받아내고 있었습니다.


붙잡고 있다고 믿었던 것들, 오래 품어왔다고 생각했던 꿈들이 사실은 손바닥의 온기를 잃은 채 조용히 빠져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알았습니다.

우리는 늘 어둠이 충분히 깊어지고 나서야 깨닫습니다.

골목 어귀로 스며드는 어둠 속에서, 희망마저 특별한 사건 없이 사라지는 순간은 그렇게 일상의 무력감으로 찾아옵니다. 그저 하루를 견뎌냈다는 이유만으로도, 사람은 쉽게 외로워집니다.


그날의 저는 삶의 이유를 붙잡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장 뜨겁고 짜디짠 눈물 속에서는 한 줄의 빛이 남아 있었습니다. 아주 짧고, 힘겹게 꺼낸 문장 하나. 다짐도 약속도 아닌 말.


“다시 어루만져 줄 것이다.”


누군가에게 건네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문장이었습니다.


내가 나를 다시 어루만져 줄 것이다.

지금은 벼랑 끝처럼 느껴지는 이 길 위에서도, 볼 위로 흐르는 짜디짠 작은 빛이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제야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천천히 눈을 뜨는 일은 용기가 아니라 태도였습니다. 한 번에 밝아지지 않아도 괜찮다고, 아직 깨어나지 않은 내 안의 꿈을 그대로 두어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주는 태도 말입니다.

.

.

.


나는 그 속에 서 있다
말없이, 얼어붙은 채로…


손끝에서 흩어지는 나의 꿈
골목 어귀 어둠 속으로
희망마저 조용히 사라져 간다


뜨겁고도 짜디짠 눈물 속에서
힘겹게 꺼내 진 단 한 줄의 속삭임


Someday, Somewhere
어느 날, 어딘가에서
나를 위한 바람은 다시 불어오고


무너진 마음을
다시 어루만져 줄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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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시집 <당신의 존재는 이미 아름답다> 중에서...




꿈은 멀리 있지 않았습니다.

늘 앞서 달려가지도 않았습니다.


빗물이 흘러내리던 그 손가락 위에서, 그렇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멈춰 설 때에야 비로소, 곁에 머물던 것들을 피부와 숨으로 다시 마주합니다.

그래서 저는 믿어보려 합니다.


Someday, Somewhere.


이 문장이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이미 지금 이 자리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요. 희망은 거창하게 돌아오지 않습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분명한 온도를 지닌 채, 조용히 다시 다가옵니다.


행복은 완성되어 선물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서

견뎌낸 마음의 형태로 살아 있습니다.



희망은 멀리 있는 약속이 아니라, 오늘을 무너지지 않고 지나온 힘겹게 견뎌낸 하루에 대한, 한 순간에 대한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캘리그라피 by 인정 이영애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