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존재는 이미 아름답다
18화.
어제를 걷는다는 것
늦은 가을의 한강을 걷고 있었습니다.
산책로를 따라 이어진 가로등 옆, 단풍나무 아래에는 이미 많은 잎들이 바닥에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바람에 한 장,
또 한 장 떨어진 낙엽들이 인도 위에 겹겹이 깔려 있었고, 저는 그 위를 조용히 밟으며 걸었습니다. 낙엽이 부서지는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발끝에는 오래 남았습니다.
가로등을 하나씩 지나며 걷는 동안,
계절이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 가을의 낙엽이 모두 지고 나면 겨울이 오고, 차가운 눈발이 한참을 지나간 뒤에야 벚꽃의 봄이 오듯이,
지금 이 발바닥 아래의 감촉 역시 어느 하루의 순간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제의 어제,
그 어제의 또 어제, 그리고 그 이전의 수많은 날들이 겹겹이 쌓여 오늘의 이 한 걸음이 되고 있다는 감각이, 순간 피부처럼 선명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때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늘 오늘을 살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언제나 어제를 딛고 걷고 있다는 것을요.
발끝에 머문 기억과 바람에 스며든 시간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늘을 지탱하는 조용한 바닥이 되어 있었습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따로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몸처럼 이어져 있었습니다.
앞으로 펼쳐진 길과 가로등,
그리고 한강으로 길게 뻗은 어둠의 선들이 한 점으로 모이며, 저는 자연스럽게 미래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멀리 달려가지 않아도, 애써 서두르지 않아도, 이미 나는 그 방향을 향해 걷고 있었습니다.
운동화가 기억하고,
양말이 기억하고,
발바닥의 피부가 기억하듯이,
나의 모든 어제들이 그렇게 나의 오늘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옷 사이로 스며들던 바람은 지나갔지만,
그 바람 속에 섞인 기억들은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오늘을 무너지지 않게 붙들어 주는 조용하고 든든한 힘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한 걸음 한 걸음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이 감각을 그대로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저는 이 시를 썼습니다.
〈어제를 걷는다〉는 그렇게, 한강의 낙엽 위에서 태어났습니다.
발끝에 머문 기억
바람에 스며든 시간
오늘의 나
어제의 나를 딛고
오늘도 걷는다
.
.
.
이 시집 『당신의 존재는 이미 아름답다』는 삶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대신 삶이 남긴 흔적을 그대로 바라봅니다. 발끝에 남은 기억과 바람처럼 스며든 시간을 외면하지 않고, 그것을 딛고 오늘을 살아내는 존재의 모습을 조용히 기록합니다.
그래서 이 시집은 위로라기보다 동행에 가깝습니다. 누군가 앞에서 끌어주기보다, 옆에서 같은 속도로 함께 걷는 느낌입니다.
오늘이 유난히 버거운 날이라면,
이 책의 한 페이지를 천천히 넘겨보셔도 좋겠습니다. 어제를 지우지 못해 멈춰 선 마음에게, 그래도 오늘은 다시 걸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글이 되어주기를 바랍니다.
어제의 나를 딛고,
오늘의 내가 다시 걷고 있다면
그 자체로 당신은 이미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이 시는 지나간 날들을 떠나보내는 노래가 아니라,
오늘을 지탱해 준 모든 어제들에게 건네는
조용한 감사의 인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