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능으로의 회귀
※ 디폴트(default)는 '별도의 대안이 없을 때 주어지는 선택지'를 의미하며, 기본적으로 정해지거나 주어지는 값이나 조건 등의 의미로 쓰인다.
"영수야, 너 이번 방학에 어디 다녀왔어?"
"어, 시골에 계신 할아버지/할머니 댁에서 일주일 정도 있다가 왔어"
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맞은 등굣길에서 만난 두 아이들의 이런 대화를 우리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아마 이런 광경은 내가 자라던 1970~80년대와 지금, 40~50년이라는 시차는 존재해도 크게 변한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대화 속에는 중요한 변화가 담겨 있다. 그것은 우리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다도 기본적으로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디폴트(default)' 값의 변화이다.
적어도 2010년대 이전까지는 우리가 인식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디폴트 값은 아버지의 부모님, 즉 부계의 값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부모님을 일컬을 때면 항상 '외'라는 말을 앞에 붙여왔다.
"어, 시골에 계신 외할아버지/할머니 댁에서 일주일 정도 있다가 왔어"
아마 2010년대 이전에 영수가 어머니의 부모님 댁을 다녀왔다면 분명히 위와 같이 이야기했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우리의 아이들이 말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부계'의 의미를 디폴트로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인식하지는 않아도 어느새 사회 전반적으로 '모계'로 디폴트가 변화하고 있다.
치열하게 자신들의 영토를 확장하고 지켜내기 위해 전쟁이라는 집단 간의 무력 충돌이 빈번했던 시대를 지나 이제 '평화의 시대'(?)가 도래한 지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전 세계적인 전쟁이었던 '2차 세계대전' 이후, 어느덧 8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이후에 일어났던 대부분의 전쟁('한국전쟁', '월남전쟁', '포클랜드전쟁', '이라크전쟁', '우크라이나전쟁' 등)들이 특정 나라나 지역 안에서 일어나는 전쟁으로 한정되고 있다. 이들 전쟁을 명명하는 명칭 자체가 그 전쟁이 국지적(局地的)이거나 적어도 한 국가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의 평화가 국가들 간의 규약을 통한 강제적인 것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과거와 같은 거대한 무력 충돌은 발생하지 않은지 오래다.
우리나라의 전후(戰後) 세대를 지나 마지막 전쟁을 겪은 때로부터 7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이제는 '부계사회'로 이끌었던 동기가 사라진 지 오래다.
빈부의 격차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과거보다 풍요롭고 더욱 평화로운 시대를 살아온 세대들이 사회의 주류가 되었다.
이제, 인류는 다시 본래의 리듬으로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전쟁의 시대가 저물고, 생존의 위협이 사라진 오늘날, 사회는 협력과 돌봄, 공감과 감성의 가치를 중요시하기 시작했다. 풍요 속에서 생존의 문제보다 관계의 질이 더 큰 의미를 갖게 되었고, 이는 다시 모성적(母性的) 가치로 수렴하고 있다.
가정 내에서 '부계'의 권위는 점점 줄어들고, 아이의 성장과 가족의 중심은 다시 어머니의 손끝에서 이루어진다. 기업과 조직에서도 ‘공감 리더십’, ‘감성’, ‘배려와 소통’ 같은 개념이 힘을 얻는 것 역시 같은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러한 '사회적 가치'와 '리더십의 변화'는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과 지위에 변화를 가져다주었고, 더 이상 사회활동과 가족 생계의 중심에 남성이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화의 시계를 거꾸로 돌려보면, 지금의 '모계사회'는 사회적, 문화적 변화가 아니라 어쩌면 모든 동물의 본성으로 '회귀(回歸)'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른다.
어느 날 딸과 아내를 따라간 미용실에서, 나는 가족의 중심이 이동하고 있음을 느꼈다...
커트가 마무리되고 미용실을 나서는데, 소파에 앉아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한 가족이 눈에 들어왔다.
내 또래로 보이는 중년의 남성, 그리고 부인과 고등학생과 대학생으로 보이는 자녀 둘...
엄마를 사이에 두고 좌, 우에 앉은 두 아들들이 무슨 재미있는 것을 보는지 휴대폰을 보며 엄마와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맨 끝쪽에 앉아 있던 남성은 세 사람의 대화에 호기심을 보이며, 가족들의 대화에서 소외되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돌려 애써 동참하려는 모습이었다.
그 가족의 모습을 보면서, 전통적 '부계사회'를 관통해 오늘날 '모계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또 다른 중년 남자인 나는 씁쓸하지만 엷은 미소를 띠며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