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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락(凋落)

삶의 미제

by DEN

옛날 기억이다. 아버지는 시간이 나실 때면 나의 손을 잡고 우리 집 근처 공원으로 데려가셨다. 몇 살 때인지, 얼마나 자주 데려가셨는지, 가고 나서는 얼마나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공원을 갔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아마, 꽤 자주 그 공원을 갔었던 것 같다. 가깝기도 가까웠고, 세월의 흐름이 과거에 흔적을 벗겨냈음에도 희미하게나마 기억이 남아있다는 것, 그 자체가 비슷한 순간들이 반복되어 덧칠되었다는 방증일 테니까.

이렇듯, 과거에 기억들은 희미하지만 유독 한 장면만이 기억 속에 남아있다. 정말 짧은 한순간만을 떠올릴 수 있지만 그 순간만큼은 선명하게 떠올려진다. 무더운 여름의 낮이었다. 공원에는 산책로, 풀밭, 작은 산, 연못 등 다양한 경관이 펼쳐지고 있었는데, 그 경관 사이로 수많은 나무가 수 놓여 있었다. 특히 아버지는 작은 풀밭으로 나를 많이 데려가셨다. 실제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밖에 없는 선명한 기억의 순간은 이 풀밭에 있다. 이 풀밭에는 다른 지역보다 큰 간격으로 나무가 심겨 있었다. 그중 하나의 나무가 있었는데, 무슨 나무인지는 모르겠으나 충분한 그늘을 만들어주는 잎이 풍성하고 생기 있는 푸른 나무였다.

쨍쨍한 햇빛이 우리를 내리쬐었고 아버지는 햇빛을 피할 심산으로 날 나무 아래로 데려가셨다. 그렇게 그늘에서 더위를 피했다. 나무에 기대앉아 바라본 하늘은 눈이 부시지 않았다. 미세한 햇빛마저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그 나무의 잎은 풍성하고 빽빽했다. 그때 생각했다. 이 나무는 평생, 내가 죽을 때까지 이 모습 그대로 남아 있을 거라고.

그 뒤로도 심심할 때면 이 공원을 찾았다. 가벼운 산책 삼아서 들리기도 했고 한 번씩 머리가 복잡해서 쉬고 싶을 때면 그 나무에 기대, 머리를 식히곤 했다. 그때도 이 나무는 그 모습 그대로 푸르고, 생기 있었다. 나는 변했다. 키가 크고, 삶도 복잡해지고, 성숙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무는 변함없이 그 모습 그대로, 그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어른이 되고 다른 지역에 직장을 구했다. 이사를 가야 했고 한동안 이 공원을 들르지 못했다. 그러다가 한 번은 추석에 부모님을 뵙기 위해 부모님 댁을 들렸다. 오랜만에 이 공원, 그리고 이 공원에 있는 나무를 한 번 보고 싶었다. 조락의 계절이었기 때문일까? 나무의 잎은 시들어 떨어지고 있었다. 가지에는 잎이 듬성듬성, 그마저도 생기를 잃어 누런빛이 나는 잎이 매달려 있었고 그 나무 주위 낙엽이 둘리어 있었다. 분명 어렸을 때도 사계절은 흘렀을 텐데, 생기를 잃은 이 나무의 모습을 처음 본다는 것이 무척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그로부터 한 달 뒤, 부모님의 일을 돕기 위해 다시 한번 고향을 찾았다. 다행히 생각보다 빠르게 그 일이 처리되었고 오후쯤에는 모든 일을 마칠 수 있었다. 의도치 않게 시간이 남아, 공원을 찾았다. 그 공원을 걸으면서 여러 추억을 떠올렸다. 격세지감이라는 말이 이 공원에는 해당하지 않는지, 이 공원은 추억에 남은 모습 그대로 변하지 않았다. 나와는 다르게.

나의 걸음과 함께 사색에 나아가는 도중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풀밭으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그 모습 자체는 크게 변하지 않았으나,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출입 금지 팻말이 걸린 밧줄이 둘리어 있다는 것이었다. 풀밭에는 인부 몇 명이 커다란 기계를 들고 작업을 하고 있었다. 작업의 모습을 보니 그 나무, 내가 어린 시절, 어렴풋이 영원히 그 모습을 지키고 있을 거라는, 영원히 푸르고 풍성한 잎으로 내게 그늘을 만들어줄 것으로 생각했던 그 나무가 잘려 나가고 있었다.

왠지 모를 허탈감이 느껴졌다. 저 나무는 한평생 저 자리에서 그늘만을 만들다가 어느 순간 조락하여 저렇게 최후를 맞이하고 있다. 영원할 것 같던, 풍경이, 이 나무가, 풍성한 푸른 잎이, 생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이젠 저 나무의 그늘에 들어갈 수도, 저 나무의 기대어 쉴 수도 없다. 모든 작업이 끝나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겠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허무함과 동시에 피곤함이 몰려왔다. 쓸쓸했다. 추억이 담긴 나무에 최후를 차마 볼 수가 없어 시선을 돌렸다. 멈추었던 발이 다시 나아감과 동시에 사색도 걸음을 같이했다.

세월 뒤에 남는 것은 조락뿐이구나. 그렇게 조락은 죽음으로, 죽음은 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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