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권

by 김인

“가난은 모욕이야.”

중년이 된 K는 단언하면서 핏줄이 올라온 손등을 움직여 커피잔을 만지작거렸다. 그 말이 깨끗한 옷을 입고 한남동 까페에 마주앉은 우리를 삼십년 전 그때로 우리 동네로 데려간다. 이렇게 장마가 지는 시절이면 여덟아홉살 우리는 엉겨 무너지는 흙계단을 타넘고 죽은 쥐가 담긴 웅덩이를 피해 걸으면서 동네 어귀에 있는 나무 밑에서 만났다. 그 나무는 자잘한 잎새가 풍성해서 땡볕일 때도 그 아래 있으면 발등에 작은 빛이 점처럼 흔들릴 뿐 쾌적했다. 신문지가 우산 대용이었다. 한두개밖에 없는 우산은 아버지나 오빠 것이었고 부모들이 일터에서 얻은 신문지가 딸애들에겐 만만한 소모품이었다. 우리는 갈색 흙탕물이 튄 옷을 입고 자주 봤다. 빌렸던 책을 돌려주고 어린애들의 단순한 말로 몽글몽글한 마음을 나누기 위해서였다. 우리 집엔 신지식 선생 번역판 앤 전집이 있었고 K의 집엔 해적판 몽테크리스토 백작이 있었다. 달동네는 모든 것이 부족하고 땅이 가장 부족해서 다닥다닥 붙어 살았기 때문에 우리는 비가 내리는 차분한 날에도 서로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노력을 해야 했다. 궂은 날씨 때문에 집에서 놀게 된 일용직 아버지들이 식구를 두드려패는 일, 고함 소리와 욕설이 우리의 작은 목소리, 순정한 경탄을 담은 독서 감상, 우정으로 밝아진 웃음소리를 삼키기 일쑤였다. 우리는 애기 우는 소리나 어느집 한탄을 들으면 따뜻한 바다같은 공상에서 금세 현실로 멱살이 잡혀왔다.

내가 빨강머리 앤이 사는 동네의 깨끗하고 아름다운 풍경, 작가가 꽃을 레이스에 비유해 적은 문장을 말할 때였다. 이삼일마다 얼굴에 순대색 멍(K의 표현)을 하나씩 더 달고 나오는 애기엄마가 외마디 비명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가 우리를 쿡 찔러서 작은 어깨 둘이 들썩였다. 내가 찡그리자 K는 한숨쉬며 많이 아프겠다고 말했다. K는 특별한 면이 있었다. 그애는 왜 우리가 늘 맞는 쪽에서 느끼는 지 모르겠다고 자조했다. 하지만 그 편이 낫다고, 때리는 입장보단 맞는 사람 입장으로 사는 게 낫다고 했다. 조숙한 소녀였다.


“우린 정신적인 삶을 원했지. 그 동네에선 불가능했고.”

K는 나직한 목소리로 그 시절을 정의한다. 그리고 자기 얘길 들려준다. 더이상 어리지 않고 더이상 가난하지 않으며 어딘가 세련되어보이는 K의 인생은 흥미로웠다. 단칸방에 삼대가 사는 환경에서 태어나 정신적인 삶을 소망하는 여자아이가 매달릴 수 있는 동아줄은 하나다.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가는 것, 많이 벌고 대접받는 것. 성공에 대한 다양한 정의가 없던 시절, 인격과 개성에 대한 다채로운 모델이 없던 시절이었다. K는 무진 노력해서 이름난 직장에 입성했고 남편도 그녀 못지 않게 열심히 살아온 우등생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일이 다가왔다.
“복권에 당첨될 줄은 몰랐어.”

그날은 K의 결혼기념일이었다. 신혼부부였던 K와 K의 남편은 하늘 가득 하얗게 비가 쏟아지는 찐찐한 여름 장마를 뚫고 00은행 본점으로 갔다. 성공의 은유마냥 길게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를 외면하고 어둑하고 먼지와 습기가 자욱한 계단으로 오르며 몸을 숨겼다고 한다. 아무 효과가 없었다. 은행 개점 시간에 맞춰 미간에 긴장을 달고 나타나는 사람은 복권 당첨금을 받으러 온 사람 뿐이어서 행원들이 한눈에 알아보는 눈치였다고 한다. 부부가 쭈뼛거리는 사이, 콧물로 만든 것처럼 번지르르한 양복을 입은 남자가 한글로 '00억원'이라 적힌 당첨금 통장을 주면서 지점장 명함도 같이 내밀었다. '저희가 자산관리도 같이 제공해드리죠'하면서 K에게는 압박을, K의 남편에게는 비굴한 미소를 보내며 횐소리를 늘어놓았다. 한숨도 자지 못한 부부는 신경질적으로 그의 말을 끊고는 집으로 돌아와 밤새 초조감을 감당해줬던 침대에 누워 잤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부터는 다 변했지. 눈뜨니 공기가 달랐어.”

“변하는 게 정상 아닐까.”

“처음엔 썼어. 이것저것 샀지. 얼마나 좋던지. 내키는대로 사고 가격표를 일부러 안 보고 사고, 보이는 것 다 사고. 그건 권능이었어. 그렇게 시간을 태웠지.”

“시간을 태워?”

“다른 세상이었어. 힘을 가진다는 건, 재력이 있다는 건. 다른 사람이 되더라고. 짜릿했지. 둘다 일을 관뒀어. 그 사람이나 나나 그 직업을 좋아해서 하게 된 것도 아니었고 이러다 평생이 가나 하면서 시시한 일상에 한심스러웠지. 미련없이 관두고 그렇게 놀다 일년쯤 됐을까, 난 예전 친구를 다 잃었고 남편이 이혼하자고 그래. 그 사람 핑계가, 아이 여럿 낳고 남들처럼 살고 싶다는 거야. 자기가 아이 낳지 말자고 고집했었으면서. 나랑은 낳고 싶지 않대.”

당첨금이 가져온 변화인 것은 분명했다. 둘은 치졸한 다툼을 끌며 서로의 추억을 심지까지 태워버렸다. 상당한 변호사 비용을 들인 끝에야 헤어졌다. K는 이혼 후 자기처벌을 하듯 금욕주의에 빠졌고 K의 전남편은 습벽이 된 광적인 분발심을 버리지 못하고 더 큰 부자가 되려고 투기에 손을 대다 감옥에 갔다고 한다. 물론 재혼도 아이도 없었다. 전남편 면회를 다녀온 후 K는 유럽으로 수도원 여행을 떠났다.

“이탈리아에 도착하자마자 가방을 도둑맞았어. 지갑도 여권도 없이 몸만 남았어. 우주에 버려진 기분이었지.”

K는 호흡곤란까지 와 거리에서 혼절했다. 우여곡절을 거쳐 스페인 시골에 있는 병원에서 두주를 갇혀 있었다고 한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그곳에서 K는 마음껏 울었다.


“돈 얼마나 남았는 지 안 물어보네? 당첨금 액수도.”

“중요한 건 아니니까.”

“여튼 귀국해서, 이제 꽃집 해.”

“아. 재미있어?”

“매일 하는데 재밌겠냐. 아니다, 좋아.”

“좋아?”

“응, 시간 잘 가.”

K는 웃고 자주색 명함을 내밀었다. 다음은 내 차례였다. 스쳐온 일들과 요즘의 진로 고민을 말하는데 그녀가 입가에 주름을 진하게 패이며 친절한 표정을 짓는다.

“난 말야, 결국은 지금처럼 꽃집하고 살았을 지 몰라.”

“그래?”
“기억 나? 네가 다이애너(빨강머리앤 친구) 집 정원 얘기할 때도 난 꽃집 하고 싶다고 했었어.”

“그랬나?”

“나처럼 인생 낭비, 돌고 돌 필요 없어. 땡기는 것 해봐. 널 내버려두면 알아서 좋아하는 걸 찾아낼 거야.”

“그래도 복권 일이 의미가 컸을 것 같은데. 너에게 필요한 경험이 아니었을까?”

“음, 가난만 모욕을 주는 건 아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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